[농암 종택 전경]
도산서원에서 먹고 잠자는 곳을 알려준 선비의 말씀에 저녘시간이 되어서야 농암 선생을 만날 수 있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에 있는 또 다른 우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곳 저곳 가는 곳마다 예전에 모든 답사를 하였던 곳이다. 35번 국도와 낙동강 지류를 따라 고리재를 넘어 쏘두들에 도착하였다. 왼편으로는 낙동강 줄기를 가득 메운 물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작은 정자가 낙동강의 흐르는 물을 끝임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 하였다. 이 정자는 퇴계선생의 제자인 금난수 선생의 정자인 고산정이다. 이곳은 봄부터 겨울까지 오랫동안 바라만 보아도 마치 청량산과 낙동강으로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 옛날 이 고산정에서는 퇴계선생과 많은 선비들이 왕래가 끊이지 않은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 또한 그들이 지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금난수 선생(1530~1604)은 어려서는 청계 김진의 문하에서, 성장해서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61년 사마시에 합격, 제릉참봉, 직장, 장예원사평, 봉화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봉화현감에 부임했을 때 마을의 향부로들을 모셔 놓고 향약을 시행하였고 만년에 산수를 사랑하여 청량산 기슭에 고산정을 짓고 자적하였다고 한다.
[고산정]
고산정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이른바 ‘예안십사곡(禮安十四曲)’의 한 곳으로 “선성지”에 “고산은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본래 두 산이 아니었으나 용(龍)이 그 산을 갈라서 둘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두 산 사이를 꿰고 지나간다. 물깊이는 잴 수 없는데, 예안현의 제삼곡(第三曲)이다. <일동정사(日洞精舍)> 현감 금난수(琴蘭秀)가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둔 별경(別境)인 이곳을 찾아서 정사를 꾸미고 홀로 오가는 장소로 삼았다. 퇴계 선생의 시가 있고 현감의 넷째 아들 금각(琴恪)의 ‘일동록(日洞錄)‘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퇴계 선생이 제자인 금난수를 찾기 위해 강 건너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물어 보았으나 농부가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만날 길 없어 구름낀 산을 바라보며 망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시로 읊었다고 한다.
書孤山石壁 고산석벽에 쓰다.
日洞主人琴氏子 날골이라 그 주인 금씨네 아드님
隔水呼問今在否 지금 계신지 강 건너로 물어 보네
耕夫揮手語不聞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들은 듯
愴望雲山獨坐久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앉았네
차는 좁을 길을 기어가듯 천천히 농암종택을 향했다. 해는 이미 서산을 넘었고 배고품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대문을 활짝 열린 종택 안으로 들어가니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변함이 없었다. 깊은 계곡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이곳이 첩첩산중의 한 곳이라는 듯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식은 하는데 어느 방에서 하룻밤을 묵객으로 남을 것인지 이리 저리 둘러 보았으나 대문채에 오선비와 함께 하기로 하고 봇짐을 풀었다.
[농암종택 대문간채]
그 사이에 일행은 어둠속을 뚧고 흐르는 물소리와 자갈밭을 걷고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간간이 들리는 목소리가 계곡에 가득 남아 굴러다닌 듯 하였다. 따끈따끈 달아오르는 방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우니 잠이 들고 말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있으니 식사 시간이 되었다고 주인장의 목소리가 계곡을 또 가득 채웠다. 어둠속에 있던 일행들이 길을 잊지 않고 모두 종택 거실과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몸을 깨끗이 닦은 후 모두 넓고 넓은 마당에 탁자를 마련에 모두 자리에 앉았다. 활활 타오르는 삼겹살 구울 불은 마당 전체를 훤히 밝히고 구수한 냄새는 종택 전체를 가득 메웠다. 하얀 호리병과 같이 생긴 “안동소주”가 탁자에 놓여지니 모두들 반가운 듯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겹살이 빨리 구워지면 한잔 마시고 싶어 고기가 익을 때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고기를 검은 빛으로 변하게 하였으며, 연기의 끄름이 삼겹살을 포장한 듯 하였다. 익은 고기를 한접시씩 대령하니 그것을 안주로 술잔에 모두 부어 “지화자”하니 “좋다”라는 구호로 한잔씩 쭈욱 마시다 보니 안주가 바쁘고 안동소주가 떨어졌다고 빨리 대령하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웃음이 계곡에 가득하였다. 얼마쯤 가을의 밤이 깊어갈 시간에 모두들 나무젓가락에 끼운 종이컵 마이크를 입 앞에 대고는 돌아가면서 한곡씩 하고나니 한 두분씩 잠이 오기 시작하더니 너도 나도 각자 방으로 갔었는데, 몇몇이 남아 대문칸 우측 방에 모여 또 다시 안동소주로 작당 모의를 하다 보니 또 한사람씩 자리를 비웠다.
[청량산 자락에 울러 퍼지는 종이마이크 소리...]
취가가 있어 집 찾아가니 왠 나그네가 남의 방을 독차지 하고 안으로 문을 잠그고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는 듯 하였다. 내 집도 빼앗기고 어디에서 몸을 쉬게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그래도 같은 대문칸 문지기라고 우측방 나그네가 불러 그곳에 잔다고는 했는데.... 밤은 깊어만 가고...... 눈을 떠 보니 아침이 훤히 밝아 왔었다.
[너렁바위에서 아침 담소...]
종택 주인께서 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너렁바위가 있으니 그곳까지 갔다 오면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는데, 나보다 먼저 갔다 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목표지점에 도착하여 주위의 산세를 보니 산은 높고 계곡은 깊고 이곳에서 물은 좌측으로 휘어져 도산서원 앞으로 흘려가는 것이 아닌가.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다시 부지런히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걸었는데, 종택 주위에는 서원도 있고 비각도 모두 정리되어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었다.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엔 이곳 서원자리는 한창 공사중이라 접근금지를 하였는데 이제 모든 것이 갖추어졌는지 이곳에서 농암 선생에 대한 의문점을 찾아 가기로 하였다.
농암 이현보(1467~1555)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서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선생은 홍귀달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황준량 등과 친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농암가>.<생일가>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문집》이 전한다. 1612년 향현사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 예안의 분강서원에 제향되었다.
농암은 '어부가', '농암가' 등의 농암문학의 창작 현장인 분강에 대해 "북쪽은 높은 산에 의지해 있고, 구름에 닿을 듯한 서쪽은 긴 숲이 무성하게 삼싸 안았다. 동쪽은 긴 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멀리 청량산으로부터 만학천봉 사이를 구비 돌아 반나절 정도 흘러와 '관어전(官魚箭)'에 이른다. 그 빼어난 모습은 긴 성과 같고, 그 앞에서는 충격으로 아래에 깊은 소(沼)를 이루는데, 이 소를 '별하연(別下淵)'이라 한다. 소는 절벽을 베개로 하는데, 절벽위에는 병풍암(餠風庵)'이라는 옛암자가 있다. 좌우로 기암과석이 뾰족한데 그 그림자가 소에 떨어져 쳐다보기조차 어렵다. 이곳으로부터 물결은 점점 완만해져서 그 모습이 징.홍.청.격(澄泓淸激)의 경계를 이룬다, 이 물굽이가 농암아래에 이르면 넗고 가득하게 퍼지고 쌓여 조그마한 배를 띄우고 노를 저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분강' 이라 한다. 강 가운데는 반석이 있어 마치 자리바위와 같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점석'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퇴계와 회동한 당시 모습을 묘사한 글을 보면, “자리바위의 감상을 경호(景浩 : 退溪의 字)와 중거(仲擧 : 黃俊良의 字), 그리고 아들, 동생들이 함께 했는데, 조그만 배를 타고 귀먹바위 아래로부터 배 줄을 풀어 천천히 흘러가서 사자바위를 지나 코끼리바위에 이르러 배를 바위에 의지해 묶어 놓고, 주변을 두루 구경하고 나서 다 함께 그 위에 올라가서 만져보고 놀기를 오래하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아래로 내려와 바로 자리바위에 이르니, 이 때는 비가 새로 개고 먼지와 더러운 것들이 깨끗하게 씻기어 매끄럽기가 마치 구슬 같았다. 다만 웅덩이에 쌓인 물이 돌 사이의 틈새에 끼여 있는데, 이러한 지세를 따라 앉음이 차례가 없고, 조그만 술상을 차렸는데 예를 갖추긴 했으나 지극히 자연스럽게 했다. 이리하여 종일토록 환담하다가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어 물빛이 흐릿하여 촛불을 켜 밝히니 바위는 분강 한가운데 드리워 있고, 강물은 여기에서 좌우로 나누어져서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 자리 곁으로 흐르고, 그 아래는 퇴계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희극을 하는데 술잔에 술을 부어 목금(땟목)에 올려 띄우니 경호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중거의 무리들이 이 정경을 보고 부러워했다.” 라고 『농암집』 ‘취시가(醉時歌)’적고 있다.
종택의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는 반드시 농암선생께서 색동옷을 입은 영정과 선생에 대한 이력이 상세기 기록된 안내판을 보고서 종택의 대문을 들어서야 한다.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정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 즉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농암종택은 농암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며, 직계자손들이 650여년을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집미며, 최초 이 집을 지은 분은 영천이씨 안동입향시조 이헌으로, 선생의 고조부이다. 자손들은 지금 이분으로부터는 23세손, 선생으로부터는 18세손까지 내려왔다. 농암선생이 ‘불천위 (不遷位: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영원토록 위패를 '옮기지 않고' 모시는 것을 허락했는데 그것을 말한다.)’로 모셔졌기에 ‘농암종택’으로 부른다.
종택은 넓은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별체, 문간채로 구성된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긍구당’은 1350년 이헌이 지은 건물이며, ‘명농당’은 1501년 선생 나이 44세 때 귀거래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 위에 ‘歸去來圖’를 그렸다.
[긍구당에 앉아 회상을 하고 있는 선비는.....]
먼저 긍구당에 올랐다. 정면 3칸 측면 2.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방은 모두 뒷면에 , 앞면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달아 개방하였고 누마루 아래에는 아궁이가 설치되었고, 양 추녀는 마치 학이 날아갈듯 날개를 펴 놓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 긍구당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이곳에 이건하였으며, 원래는 이헌이 고려말에 도산면 분천동에 창건하여 별당으로 사용하다가 이현보가 중수하여 ‘긍구당’이라 이름붙인 후 종택 별당으로 사용되었고, 농암 종택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지금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분강서원 전경]
다음으로 찾은 곳은 분강서원이다. 이 서원도 긍구당과 같이 분천동에 위치하였는데 안동댐 건설로 1975년에 도산면 운곡리로 옮겼다가 2005년에 다시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정문(유도문)을 들어서니 동재와 서재가 그리고 중앙에는 강당인 홍교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뒤로 가보니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은 1827년에 건립하였으며, 농암 이현보 선생의 위패와 별본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퇴를 둔 형식으로, 정면 3칸에 모두 궁판이 있는 정자살분합문이 있으며 측벽에도 정자살 광창을 내었고 홑처마 맞배집으로 네모기둥에 납도리 5량 가구인데, 종도리를 받친 대공은 ‘工’자형으로 되었다. 분강서원 우측에는 관리사안채와 바깥채가 서로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간밤에 이곳 바깥채에서 나그네들이 잠을 자고 나오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둘러보고 다시 농암 신도비를 찾아갔다. 서원 서편에 자리 잡은 신도비는 1565년 2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영의정을 역임한 인재 홍섬이 지었으며, 글씨는 당대 제일의 명필인 여성군 송인이 썼다고 한다. 비는 단단한 대리석 차돌로 되어 있어 새겨진 글자는 마모된 것이 없었다. 이 비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6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積善]
아침 햇살이 농암종택 전체를 비치고 있었고 긍구당 누마루에 앉아 앞에 누워있는 병풍같은 절벽과 그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낙동강물을 바라보면서 무었인가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 사람은 옛 선비와 다름없었다. 종택의 사랑채 벽에는 “積善” 굵고 큰 글씨가 걸려 있었는데,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옛 글에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이란 글귀가 생각이 났다. 즉,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라는 뜻인 이글이 적선과 무었이 다르겠는가. 사랑채 마루에 앉아 보아도 긍구당과 같은 그 느낌을 받는 곳이 아니겠는가. 안채에서 우리는 맛있는 음식으로 아침을 맞이하였다. 우리의 전통가옥에서 모두 둘러 앉아 아침을 먹는 모습이 그 옛날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안방에서 먹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농암종택과 민가]
대문채를 나오니 언제 지어진 집인지 모르나 작은 민가주택 2채가 숨어 있는 듯 하고, 마당에 앉아 부지런히 채소를 다듬는 할머니는 나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편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름을 가을로 만들고 있는 계절 아침부터 잠자리가 주위를 맴돌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침의 매미소리는 냇물과 혼성되어 소리의 맛도 잊어버린듯 하였다.
한사람 두사람 대문채를 나와 버스에 오르니 농암 종택을 뒤로 하고 왔던 길을 따라 다음에 만날 선비를 찾아 떠났다. 이날이 2007년 10월 13일 09시35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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