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달산봉수대의 횃불을 기다리며
더없이 넓어만 보이는 푸른 물결의 동해바다! 끝없이 넓은 바다에는 수 척의배가 움직임 없이 조용히 바다와 잠을 자는 듯하다. 이곳 동해어달산봉수대까지 오기까지 힘겹던 모든 시름이 사라진다.
이른 새벽 찬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영동고속도로는 넓어 보이기만 하다. 동서울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호법에서 영동고속도로를 옮겨 타고 달리다 보면 강릉 땅에서 다시 동해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다 내음을 마시며 망상톨게이트를 빠져 나온다. 어느덧 3시간이 조금 넘어 동해어달산봉수대 주차장에 도착된다. 이 과정이 멀리 서울에서 동해시 대진동에 위치한 봉수대에 오기까지의 긴 여정이다.
[동해어달산봉수대]
동해어달산봉수대는 동해 대진마을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어달산으로 그 옛날 대진마을을 한나루라고 불렀고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봉우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봉우산에 사람들은 오르기를 꺼려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시신을 화장하던 곳이라서 사람들은 섬뜩한 장소로 여겨서 접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항상 전설적인 이야기만 전할 뿐 봉수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오랜 옛날 어린시절 봉우산(어달산)에 땔감을 하러 가서 몇 차례 보았던 그 당시의 봉수대의 모든 것을 들려주신 아버지의 봉수대 옛 정취를 머리에 그려보곤 한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의 그 어린시절과 같은 과정을 밟으며 나의 어린시절 봉수대 높은 돌무지에 올라 그 많은 돌을 굴러 내리는 한 목동에 불과했지만 어린시절의 봉수대 모습이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봉수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모되어 한 동안 세월을 정지시켜 놓았다. 그 많은 돌을 목동들은 서로 힘을 보태어 화장터로 굴러 내리는 쾌감은 어린 동심에서 울러퍼지는 환희의 대보름 불꽃놀이와 같았다. 그 놀이도 부족해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던 크고 작은 대접과 사발을 바위에 올려놓고 돌팔매질로 깨뜨리는 그 맛은 동해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시절을 회상하면서 톱과 낫, 그리고 전지가위, 쓰레기봉투,카메라를 메고 들고 봉수대로 오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길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우리의 토종 소나무와 사계절 변화의 길을 알려 준 다양한 종류의 야생화가 먼저 반긴다. 터널 같은 숲길에 들어서면 훤히 뚫어진 비탈길, 까마득히 보이는 넓은 길을 오르면서 봄에는 가장 먼저 양지꽃이 이곳저곳 양지바른 곳에 노란 색으로 덧칠하고 아직도 추워서인지 온몸에 털을 가득 두르고 있고, 여름이면 산도라지가 보랏빛 색을 잔득 머금고 따가운 햇살을 기다리며 터질 준비를 하고, 가을이면 이곳 저곳 쑥부쟁이가 연한 분홍빛으로 연한 보랏빛으로 제 각각 많은 꽃잎을 만들어 놓고 오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이면 청미래덩굴 열매가 빨갛게 봄까지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서 오르다 보면 어느덧 봉수대에 다다른다. 몇 해 전까지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파가 봉수대 바로 밑 범바위 밑에 하얀 소지종이를 작은 돌에 실로 묶고는 그곳에서 수없이 많은 세월에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지금은 이곳을 찾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았다. 그때 묶어 두었던 소지종이는 비바람에 그 모습을 잃어가고 주위에도 많은 잡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봉수대 오르는 길]
지난해 초에만 해도 이곳 봉수대로 오르기란 쉽지가 않았다. 좁은 오솔길인 산길을 오르다 보면 청미래덩굴과 각종 야생화가 길을 막곤 하였는데 지금은 넓은 길을 오르는 데는 아무 거칠 것이 없다. 2005년 4월 25일부로 1문화재 1지킴이로 위촉되어 본격적인 문화재에 관련된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동해어달산봉수대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통신발달의 바탕이 된 전국의 봉봉수대를 답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사람을 위한 봉수대의 주변 환경이 조성된 것을 새삼 느끼면서 동해어달산봉수대의 각종 환경과 시설물 등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동해어달산봉수대의 원래의 명칭을 갖기까지 묵호봉수대, 월소산봉수대, 월유산봉수대 등 다양한 명칭이 붙여졌다. 확실한 근거 자료를 찾기 위한 많은 노력 끝에 명칭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어을달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어달산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를 근거로 "어달산봉수대"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이를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싸워야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하였다. 내 스스로 결정한 "동해어달산봉수대" 1문화재1지킴이를 한다고 신청하였으니 문화재청 담당공무원은 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집 근처의 문화재를 찾아 1문화재1지킴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데 그 머나먼 곳에 있는 문화재를 선택하였으니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닐까 2했을 것이다. 그러나 1문화재1지킴이 위촉장을 받고 매우 반갑고 고마웠다. 그리고 가족들이 중립을 지키고 내가 하는 대로 따라 준 것이 더욱 고마웠다. 그 멀리까지 가족 모두가 가기에는 년 1회 정도에 불과하고 그 외 지킴이 활동은 혼자 또는 아내와 함께 한다. 아내는 문화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남편이 문화재에 대해 너무 깊이 관심을 갖다보니 이제는 우리의 문화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겠다고 한다.
[봉수대에서 본 망상들과 해수욕장]
동해어달산봉수대는 1971년에 강원도기념물 제13호 지정 관리되어온 북쪽으로는 오근산봉수, 남쪽으로는 광진산봉수와 연결된다고 하였으며, 또한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에서 정리된 5개 노선 상에서 직접 파악되지 않음으로서 간봉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봉수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오다가 2000년 7월27일부터 8월24일까지 30일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이 끝나고 복원 후 발굴조사과정의 사진자료를 통해 나타난 봉수대의 모양은 내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말씀과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모양이 드러났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동해어달산봉수대에 복원에 대한 문제점, 봉수대 접근 도로 문제, 7번국도상 및 대진마을 해안도로 봉수대표지판, 봉수대 주차장 문제, 봉수대 안내판 내용 문제, 각종 봉수대 관련 내용 불일치 문제, 봉수대 주변 환경 문제, 봉수대 연호 및 연대주변 잔디 식재 문제 등등을 건의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건의한 것은 발굴과정에서 나타난 봉수대의 기단부분은 네모형태로 되어 있는데 연대부분은 기단부분의 중앙에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복원을 하면서 기단부분만 3단으로 쌓고 그 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어 누가 보아도 제단(祭壇)으로 착각할 정도로 복원되어 있어 이를 사진 상으로 나타나 있듯이 1~2단이라도 연대부분을 복원해야 전체의 대략적인 형태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기로 하였다. 2004년 2월12일에 해당 시에 어달봉수대 기단부분 만이 복원이 되었고 연대부분은 복원되지 않아 그 형태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은 돌은 봉수대 서쪽 편에 쌓아 놓았기에 이 돌로 연대부분을 일부라도 복원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요청일로부터 4일 경과 후 그에 대한 답변은 "<생략>어달산봉수대는 지정당시에 관련학계나 전문가의 고증 없이 주변의 돌들을 쌓아서 원형의 형태일 것이라고 복원하여 2000년까지 보호관리 되어왔으며, 2000년도 어달산 봉수대정비 "복원계획"을 수립하여 1차적으로 어달산봉수대 정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전문기관인 강릉대박물관에 의뢰하였고, 발굴조사 결과 연대부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2~3단 정도의 기단만 남아있고, 방형의 기단으로 동북모서리에 출입구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연조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숯과 재가 남아 있어 연조가 있었으나 파괴된 것으로 조사되었다.<생략>연조부분은 정확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어 이번 정비공사에서 제외되었으며, 주변의 돌을 쌓아 놓은 것은 봉수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석재로서 향후 연조등의 복원 시에 사용할 귀중한 자료입니다. 어달산봉수대는 관계전문기관, 문화재위원등의 자문을 받아 현재의 고고학적 방법으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알려드리오니 이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회신을 받았다. 이 문제는 추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되어 어달산봉수대에 관련된 자료를 더 찾아보기로 하고 또 다른 사항을 요구하게 되었다.
동해안을 여행하거나 답사를 위해 이곳을 찾고자 할 경우에는 누구나 이정표를 먼저 보게 된다. 동해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달산봉수대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100의 1도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무릉계와 심곡문화마을 그리고 천곡동굴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동해시민들 대부분 알고 있다고 대답을 한다. 이곳은 모두 도로이정표와 관광안내 팜프렛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1문화재1지킴이 활동을 하기 이전부터 어달산봉수대 이정표에 대해 많은 질의와 개선책을 요구하여 왔던 사항인데 1문화재1지킴이 활동을 하고부터는 더 힘이 생겨 "동해어달산봉수대도로 표지판 설치"를 요구하였다.즉 "동해시를 찾다보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문화재 이정표입니다. <생략>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지방이라 생각됩니다. 이곳에는 10곳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광지에는 이정표가 있어도 문화재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략>동해어달산봉수대 이정표를 도로 표지판과 함께 표시되 있으면 합니다."라고 건의를 하였다. 7일 경과 후에 답변이 "귀하께서 건의하신 표지판 설치 건에 대하여 하반기 표지판보수에 반영하여 설치토록 하겠으며 건의하신 모든 장소에 설치할지는 예산범위내에서 적극 검토하겠으며 앞으로도 시정발전에 많은 협조 부탁드리며“라고 하였다. 그 후 계속 설치가 늦어지자 2007년 5월에 또 다시 "가난한시의 모습"이란 제목에 문화재 이정표에 대해 건의하였는데 3일후 "동해어달산봉수대"이정표가 7번국도상에 4곳에 설치되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숙원이었던 문화재이정표가 설치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봉수대 주차장에서 봉수대로 올라가는 입구에도 이정표를 세우자고 건의키로 하고 2006년 9월 말경에 시청 담당자와 면담을 하기로 약속하고 찾아갔다. 그 동안 1문화재1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보고 느낀 점과 동해어달산봉수대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대화를 하였다. 문화재 지정되기 전의 봉수대 모습, 봉수대의 명칭의 변화,문화재 지정 당시의 봉수대 모습, 봉수대 발굴 및 복원 후의 모습과 안내판의 내용에 관한 문제, 교통문제, 봉수대 답사 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주변 활용 방안 등을 의논하였다. 모든 것은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었다.연차적으로 최대한 반영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요소가 많은 사람들이 봉수대에서 또 다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나의 1문화1지킴이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나의 1문화재1지킴이 활동이 문화재를 보는 눈이 새로워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정확히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몇 개월의 시간을 갖고 경상북도 소재의 문화재를 모두 답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다양한 측면에서 그 가치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다시 동해어달산봉수대에 답사에 미비한 점을 찾아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봉수대에 대한 각종 자료를 찾아 이를 비교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출판물, 발굴보고서, 홈페이지, 안내판 내용 등을 발취하여 비교 하였는데 많은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각종 자료에 실려 있는 내용이 달리 기록되어 있어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혼돈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정보가 또 다른 잘못된 정보를 생산할 수 있는 요건이 될 것 같아서 이를 정정 건의를 하기로 하였다. 2006년 10월 중순 "동해어달산봉수대 해설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생략>정확한 고증과 자료를 근거로 했어야 하는 문화재 해설이...관광홈페이지에 나타난 내용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봉수대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과도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10월 말경에 회신이 오기를 "민원인께서 지적하신 부분은 빠른 시일 내에 확인하여 설명이 동일하도록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회신이 왔었다. 그 후 2007년 5월6일 봉수대 지킴이 활동을 하기 위해 올라갔더니 아직도 내용은 변함이 없이 그대로였다.이를 보고 다시 5월 12일에 "가난한 동해시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생략>얼마 전에 이에 대한 의견을 문의하였는데 곧 안내판을 설치한다고 하였는데 아직도 예산이 없어서 설치하지 못하였는지..." 라는 내용으로 건의하였는데 아직까지 정확한 의견을 주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지난해 연말까지 있었던봉수대 입구 안내판이 철거되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여 그 사정을 들어보니 새롭게 제작하여 설치하려고 철거하였고 한다. 그러면 봉수대 앞에 세워진 안내판은 왜 철거하지 않았는가 하였더니 새롭게 제작한 후 설치할 때 철거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고 정화하면서 문화재를 접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 뒤따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또 지킴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선다.
이번에는 봉수대주차장 주변의 쓰레기 문제와 협소한 주차장 확장 문제를 2006년에 건의한 바 있었다. 주차장문제는 개인 소유의 땅이 있어서 어렵지만 한번 추진해 본다고 하였고 쓰레기 문제는 곧 시행토록 한다고 하였다. 그 후 1개월이 지났을까 지킴이 활동을 하기 위해 주차장에 도착하니 쓰레기는 없는데 주차장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주차장 문제를 이야기 했더니 추진한다고 하였는데 2006년 말에 주차장이 대형버스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져 있었다. 매우 흐뭇하였다. 멀리 타 지방에서 이곳 봉수대를 답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을 때 주차할 수 공간이 없을 때는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처음 동해어달산봉수대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답사에 따른 각종 정보를 얻기 위한 준비가 하나씩 마무리 되어가는 것을 보니 커다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홈페이지의 낡은 사진 교체를 위해, 2006년 10월 9일 동해어달산봉수에 관련된 동해시 홈페이지 문화재를 검색하던 중 1980년대에 촬영된 문화재 사진의 빛바랜 모습으로 올려져 있었다. 그 사진은 나에게 친숙한 사진이란 것을 알았다. 어린시절 그곳에서 돌 굴리는 놀이를 하면서 보았던 모습의 사진이 있어 매우 궁금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동심의 그때를 새롭게 떠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 사진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속 홈페이지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해시에 "관광홈페이지 사진 교체"라는 제목으로 동해어달산봉수대 사진 교체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당일 사진이 최근사진으로 교체되었다는 회신을 받아서 매우 흐뭇하였다. 아직도 우리의 문화유산은 발굴과 복원 등으로 다시 태어나 있는 문화재가 새롭게 태어나기 전의 모습으로 홈페이지에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언젠가는 현재의 모습으로 모두 바꿔진다면 좀 더 문화재에 접근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된다.
각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접근하는 곳이 고속도로 휴게소에 관광안내소라고 되어 있는 안내소를 찾는다. 그곳에 가면 그 지역에 해당되는 관광안내 팸플릿이 진열되어 있다. 그 팸플릿으로 가고자 하는 문화재를 쉽게 접근하게 되는데 어떤 지방은 문화재를 제외하고 관광지만을 표시한 곳이 있었다. 내가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는 동해시도 마찬가지였다.매년 발행되는 팸플릿에는 어달산봉수대와 기타 문화재 9종은 팜플릿에 빠져 있었다. 2006년 10월 3일 동해시에 "동해시 관광 팸플릿에 '어달산봉수대‘ 삽입하여야 함"이란 제목으로 "<생략>특히 '어달산봉수대'는 문화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관광지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9월 23일 한 시간도 안 되어 15명이 답사를 하러 왔다 가면서 나에게 팸플릿을 보여 주면서 왜봉수대가 제외되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지만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관광안내 팸플릿에 문화재가 빠져 있다."는 내용으로 건의를 하였는데 대답은 즉 "<생략>향후 우리시 관광홍보책자 추가 발간 시 귀하의 의견을 수렴하여 문화와 관광을 접촉할 수 있도록 문화부분에 대한 자료를 보강하도록 적극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답을 받았다. 처음부터 좀 더 신중한 검토를 하였다면 여유 있는 공간에 충분이 인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텐데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렇게 동해어달산봉수대에 대한 관심과 우리의문화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더 많은 문화재의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어 지방자치단체에서 발행한 관광안내 팜프렛을 모아 비교도 하면서 새로운 것을 알기도 하였다.
5월 12일 또 다시 "가난한 동해시의 모습"이란 제목에 복합적인 문제를 건의하였으나 그에 대한 회답은 하지 않고 주변 잡초만 제거 한다는 내용만 있었다.너무도 허탈한 마음 달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봉수대 주변에 나는 잡초에 대해 몇 년 전부터 봉수대 주변에 잔디를 심어 흙과 자갈이 흘러내리지 않도록하자고 건의를 하였으나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잔디를 심는다고 하였으나 벌써 3년째가 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먼 길을 달려 동해까지 갔다 오면 하루가 모두 가고 깊은 밤이 되어서야 서울의 땅에 도착되는데, 나 혼자를 위해 봉수대에 올라 열심히 지킴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이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하나라도 얻고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인데 너무도 황당하고 알맹이 없는 답변만 나오는 현실이 지킴이 활동을 그만둘 생각도 해 보았보았다.그러나 이제는 더 많은 문화재 보호와 더 발전된 문화재의 소중함을일깨워 주는 알림이 역할을 하는 것이 사명처럼 느껴졌다. 어디에 숨어서 빛도 보지 못한 문화재를 끊임없이 찾아서 그 빛을 발할 때까지 지킴이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봉수대의 잡초는 지킴이 활동을 할 때마다 주변 정리를 하여 시에 잡초 제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도록 하고 고속도로에 오른다.
[영덕 대소산봉수대]
2006년 6월11일 포항에서 동해안을 거슬러 영덕군 축산면에 있는 대소산 봉수대를 찾았다. 하늘도 쾌청하고 멀리 동해바다와 서쪽의 높은 산, 북쪽의 긴 해변을 조망할 수 있는 대소산 봉수대는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봉수대의 소중함과 문화재적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봉돈의 벽을 타고 봉돈에 오르다 보니 매우 위험한 상태로 쌓아 놓은 돌이 금방이라도 튕겨 나올 것만 같았다. 때마침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 30여명이 부부동반으로 이곳에 유희를 온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봉돈의 벽을 타고 봉돈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는 말했다. 올라가지 말라고, 그리고 모두 내려오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는 한이 있어도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그 소중함을 일깨워 주려고 그 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곳이 문화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봉수대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설명해 주었다. 한참동안 설명한 후 사람들은 한마디씩 죄송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즉시 영덕군청에 전화를 하여 대소산 봉수대가 무너질 위험이 있으니 사람들이 봉돈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담당공무원은 죄송하다면서 즉시 조치를 취한다고 약속하였다.
3년째 접어든 1문화1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문화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이를 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를 접근하기 위한 1차적 문제점을 해결해 놓는다면 쉽게 접근하면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동안 문화재 접근을 위해 3년 동안 사람의 발자국이 많이 닫지 않는 곳의 문화재를 찾아 주변을 정리하고 찾아갈 수 있는 길도 내어 주었다. 끊임없는 문화재 사랑에 조금이나마 한몫 하는 지킴이가 되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지난 5월 6일 동해어달산봉수대에서 지킴이 활동을 하고 7일에는 울릉도로 향했다. 울릉도에 있는 문화재는 많지는 않지만 울릉도 전체가 문화재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울릉도 소재 문화재는 이정표가 없어 접근하는데 많은 어려움 있으며 또한 문화재 해설사가 없어 문화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정보를 줄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다.
1문화재1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새롭게 보는 문화재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정보를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데 한몫을 할 것이다. 동해어달산봉수대의 횃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문화재를 지킬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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