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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스며든 옛 색깔의 흔적을 보면서

알리미마당/ 답사·탐방 안내방

by 국보와 보물 2023. 11. 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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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본 보문호 넘어 천마도

시인.수필가 정진해

창에 드리워진 커튼을 밀었다. 보문호 건너편에 천마도가 보였다. 천마도는 중국 왕조를 세웠던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치면서 고구려에 유입되어 점차 신라로 확산하여 그 증거로 천마총의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점점 햇살이 천마도를 덮고 있다. 모두 기상하여 오늘 여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도 간단히 끝내고 점심 식사를 잘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준비되면서 퇴실 절차까지 모두 마치고 출발하였다. 오늘은 불국사를 거쳐 거창의 감악산 풍력소 축제장, 화림동 계곡의 농월정, 함양 동호정, 거연정을 둘러보고 지리산 참샘산방의 숙소로 이동하는 장거리 일정이다. 오늘은 특히 옛 선비들이 자연을 벗하며 풍류를 즐기고, 시를 짓고, 후학을 강학하던 누정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불국사로 가는 숲길, 낙엽이 떨어진 가을 정취를 밟으며...

미끄러지듯 출발은 불국사로 향하고 있다. 경주의 대표적 종교시설이고 관광지이기도 하다. 여러 차례 찾아서 신라의 불교를 이해하는 시간도 가져 보기도 했던 곳이라서 특별히 무엇을 찾기 위해서 가는 것보다 신라의 불교문화를 다시 보는 것도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많은 관람객이 불국사 정문을 향해 모여든다. 가을의 색이 곱게 물든 나뭇잎에는 아침이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낙엽이 된 붉고 노란 잎을 주워 책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가 누구에게 짧은 이야기를 적어 보냈던 지난날의 소년 소녀 시절을 회상하는 이 시간도 또 다른 불국사의 관람에 맛을 더해준다.

불국사 일주문이면서 출입문

불국사 일주문은 출입문이다. 지난 54일부터 입장료가 없어져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좌우의 각각 아름드리 기둥 하나로 무겁고 넓은 지붕을 이고 있는 일주문이 무거워 보인다. 기둥은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다. 일주문의 의미는 모든 진리는 하나로 들어간다는 만법귀일((萬法歸一)과 우무만유(宇宙萬)는 일심(一心)이라는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는 법화경의 일불승(一佛乘)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문을 우리는 들어섰다.

연못에 드리운 가을 풍경

불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신라 경덕왕(751) 때 김대성이 창건하고 혜공왕(774) 때에 완공된 신라의 사찰이다. 옛 사찰의 풍경은 어떠했겠느냐는 물음을 던지며 걷는다. 버드나무와 편백, 단풍나무가 서로 다투듯 멋을 부리고 그 멋이 연못에 드리운다.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에도 나무를 가득 싣고 둥둥 떠 있는 모습이다. 천왕문으로 가는 길목의 연못은 홍예교인 해탈문을 건너야 한다. 연못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홍예교는 좌우에 나무들이 끝을 감추고 있다. 원래 불국사에는 연못이 없었는데, 1973년에 불국사를 복원하면서 안압지를 참고하여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해탈교를 건너도록 하였다.

우리는 해탈교에 서서 연못 방향을 지켜보면서 연못에 드리운 주변 나무의 반영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잎에 영양분과 물의 공급을 중단하니, 잎은 부족한 영양분과 물로 생명을 이겨 나가야 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스스로 잎의 상태를 변화시켜 가는 것을 우리는 멋있다 아름답다 등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물 위에 비치는 단풍색은 잔잔한 파랑에 율동하듯 멋을 부린다. “! 사진 찍어!”, “반영을 배경으로 해서 찍어줘!” 그렇게 서로서로 사진을 촬영하였다. 사천왕문을 들어서기 전 반야교를 건너야 했다. 해탈교에서 본 연못보다 작은 연못이 나무에 쌓여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반야는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며, 도의 어머니라고 한다. 반야교를 건너는 것은 곧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국사 대왕문
칼을 잡고 있는 동방지국천왕

반야교를 건너 사천왕문을 들어섰다. 용과 여의주를 들고, 삼지창과 탑을 들고, 칼만 들고, 비파를 든 사천왕은 잡귀와 악한 기운을 막는 역할을 담당한다. “, 무섭게 생겼다. 그런데 왜 발로 사람을 밟고 있을까?”, “원래 사천왕은 옛날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는데,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서 원래의 모습이라고 하고, 발로 밟고 있는 게 마귀들이야.” 사천왕상 앞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불국 세계의 관문에 해당하는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 섰다. 오를 수 없는 계단, 떨어진 거리에서 자하문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돌아 대웅전 구역으로 들어섰다.

불국사 대웅전

불국사의 대웅전은 김대성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다시 지어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5칸으로 이루어졌으나 정면 쪽이 각 칸이 측면보다 긴 편이다. 먼저 대웅전으로 간 누나와 동생들은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 전에 참배하고 나왔다.

대웅전의 불상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등 옆에 서서 대웅전을 바라보았다. 바깥이나 안을 보면 매우 화려한 단청을 보고 있다. 지금은 많이 벗겨지고 탈색도 되었지만, 그래도 은은히 풍기는 색감과 문양이 주는 안정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첨차의 쇄서 위는 연꽃 봉오리와 봉황 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또한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도 매우 화려하다. 특히 정면의 좌우 두 칸씩 쌍분합교살문을 달고 가운데 칸은 화려한 사분합꽃살문을 달았다. 내부의 천정은 우물반자로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다,

법당 내의 사자상, 사자상은 문수보살을 상징

법당을 보면, 용이 많은데 이유가 뭐요?” “그것은 극락으로 갈 때 배를 타고 가는데 이 배를 용이 끄는데 이 배를 반야용선이라 하고, 그 배가 바로 법당이니 당연히 용이 있어야 하지, 그래서 용을 장식하게 된 것이라네요.” “저 추녀 밑에 용은 여의주를 물지 않고 물고기를 물고 있는데?” “저것은 중국에서 넘어온 풍습이랄까? 중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가 8()인데 이는 부자를 뜻하는 부()와 발음이 비슷해 의미도 통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의주의 여()자가 물고기 어()와 발음이 비슷하기에 물고기를 문 용은 여의주를 문 보통의 용과 같다는 의미라네.” 대웅전에는 용 외에도 여러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상, , 주작, 사자상, 원숭이상 등이 있다. 내부의 안 시렁 위에 사자상은 문수보살을 상징하고, 코끼리상은 보현보살을 상징화한다. 코끼리는 희색, 사지는 흰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의 점이 있다. 문 앞쪽의 기둥 위에는 원숭이 형상의 동물 등에 업경대(業鏡臺)가 꽂혀있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업경대(業鏡臺)라는 거울 앞에 서게 되는데, 그때 전생에 쌓은 자신의 업이 거울 안에 비치게 되며 염라대왕은 거울에 나타난 그 업보에 따라 다음 생()의 등급을 결정한다고 한다. 대웅전에서 관심을 두고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오늘 우리의 시간은 조금이나마 눈으로 확인해 갈 수 있는 것만도 좋은 시간이다.

다보탑과 석가탑

대웅전 앞에는 다보탑, 석등 석가탑이 신라의 옛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머리를 들어 위로 쳐다보아야 탑의 상륜부 끝을 볼 수 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가 있는 석탑이다. 백제 사비성에 살고 있는 석공이 신라의 불국사 탑을 만들게 아내 아사녀를 두고 서라벌로 오게 되었다. 3년이란 긴 세월 남편 아사달을 보지 못한 아내 아사녀는 서라벌 불국사를 찾아와서 남편을 만나기를 청했으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 만날 수 없다고 하였다. 석탑이 완성되면 그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것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아사녀는 매일 밤낮으로 그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런 어느 날 달빛에 탑 모습이 연못에 비쳤다. 아사녀는 탑 그림자를 만져보려고 모심고 손을 뻗었는데 그만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그 후 아사달은 탑을 완성하고 서라벌에 온 아내 아사녀를 찾았으나 이미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아사달은 아내가 빠진 그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서라벌 사람들은 이 연못을 그림자 못이라는 뜻으로 영지라고 불렀고, 그림자를 비치지 않았던 탑을 무영탑(석가탑)이라 불렀고, 그림자를 남긴 탑을 유영탑(다보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가탑 주변의 8개의 연꽃 문양

여기 연꽃이 있으니, 연못으로 보면 되겠네.”, “글쎄”, 석가탑 주변에 여덟 송이 연꽃 문양이 새겨진 연화좌가 배치되었다. 이 연화좌는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한량없는 부처들이 8방에서 찾아와 석존 주위에 둘러앉았다는 법화경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상륜부의 앙화 네 모서리에 있는 주악 비천상과 네 변의 공양 비천상도 석가탑의 상징성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본다. 석탑 주변의 연꽃 문양은 아사녀와 아사달의 설화와 관련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다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부처니므이 말씀을 정리 해 놓은 무구 정광 다라니경의 발견되었다. 이것인 사람이 만든 인쇄물 중에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한 마리만 남은 사자상

다보탑은 석탑 중에 가장 아름다운 탑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4마리의 사자가 있어야 하는데 한 마리만 탑을 지키고 있다. 1902년의 기록에는 4마리의 사자상이 있었다고 하였다. 1909년에 동사자 한 쌍이 없어졌다는 기록, 1936~1944년의 기록에는 사자 한 마리에가 극락전 앞에 있다고 하였다. 그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보탑을 지키던 돌사자 3마리가 사라지고 현재와 같이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그 행방을 모른채 다보탑은 기다리고 있다. 불교에서 사자는 용맹한 모습과 백수의 왕이라는 이미지가 부처님의 위엄에 비유되어 사자를 신성시한다.

관음전으로 오르는 낙가교와 해안문
관음전
사리탑

우리는 관음전으로 향했다. 낙가교를 올라 해안문을 통과하여 관음전 앞에 이르니 관람객들이 붐볐다. 6명이 함께 움직이기에는 어려웠다. 각자 눈으로 보고 끝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관음전에서 사리탑으로 이동하였다. “이 탑은 무슨 탑이야?”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알 수 없는데, 일본인이 가져갔던 것을 되찾아 온 거야. “불국사의 사리탑은 이것 외는 보이지 않는 신라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1,200여 년 동안 승려들의 사리탑이 수없이 많이 있을 것인데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구름무늬의 강한 생동감, 연꽃 문양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사리탑은 본래의 위치가 아닌 듯하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반출된 것을 1933년에 반환 되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
돼지상

우리는 극락전으로 향했다. 대웅전은 많은 관람객으로 내부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극락전에는 한가한 시간이다. 극락전 앞에 황금돼지 조형물이 있다. 많은 관람객이 만져서 반질반질하다. “그런데 왜 여기에 황금 돼지상을 둔 거야?”, “먼저, 이 극락전을 둘러보고 꼭 같은 돼지를 찾아보는 게 먼저야, 찾아봐!” 누나, 동생들, 매제까지 건물을 돌며 돼지상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황금 사장상으로 다시 왔다. “없는데, 안에 있는 게 아니야?” “아니야, 분명 밖에 있지.” 돼지상은 극락전 현판 뒤쪽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길이 50cm가량의 돼지 형상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훼손되었다가 조선 후기 재건 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져 현판 뒤 처마 밑에 숨겨졌는데,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극락정토의 복돼지는 부와 귀의 상징인 동시에, 지혜로 그 부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은 대웅전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꼽는다.

연화교와 칠보교

극락보전을 나서며 전각 관람은 여기서 끝나고 연화교와 칠보교를 보기 위해 앞으로 향했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오르면 조금 전에 보았던 극락전에 이른다. 아래쪽에는 돌계단 10단이 연화교이고, 위쪽에 있는 돌계단 8단이 칠보교이다. 이 돌다리에 올라서면 안양문에 이른다. 다리의 의미는 아미타불이 거주하고 있는 극락이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리의 밑은 무지개 형태의 홍예교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보호를 위해 오르내릴 수 없게 통제하고 있다. 먼저 본 청운교와 백운교도 마찬가지로 보호를 위해 앞에서 눈으로 모양과 다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듯이 연화교와 칠보교도 마찬가지이다.

안양문과 자하루

조금 뒤로 물러나 당간지주 앞에서 안양문과 자하문 방향의 정교하게 층층이 쌓아 올린 기단석을 보면서 이것이 신라의 예술이구나!”라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돌들이 완전히 나무를 톱으로 잘라서 쌓은 것 같다.” 정말 톱으로 잘라서 차곡차곡 쌓을 때 부처님의 설법을 마음에 새기고 완성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당간지주도 마찬가지로 석공이 다듬어 세운 것이다. “여기에 웬 돌기둥이 세워 놓은 거야?” “이것을 당간지주라 하는데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높이 깃발을 꽂아 알리는 역할을 했던 것인데.” 지금은 사찰의 행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리기 때문에 높이 올리는 깃발은 별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당간지주에 철재 원통이 몇 단으로 올라가고 그 위에 긴 장대를 꽂히고, 다시 장대 끝에 깃발을 다니 전체의 높이가 10m 이상의 높이가 되지 않을까 한다. 현재 잘 남아 있는 게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이 잘 남아 있고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이 잘 남아 있다.

당간지주
불국사 답사를 마치고

사찰을 좀 더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한다. 그 동안 몇 차례 관람을 하였지만, 오늘처럼 많은 전각이 아닌 몇 곳의 전각과 석조물 등을 보면서 찾지 못했던 이야기를 찾아서 함께 의견을 교환하며 천천히 반야교를 넘었다. 반영은 다시 새로운 물그림자로 일렁이고 있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잔잔하게 밀려가는 물결은 파도를 만들지 않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곤 한다. 불국사에는 신라의 불교가 머물러 있기에, 많은 관람객이 찾아와 실체를 알기 위한 느림의 발걸음이 연속된다. 우리 가족의 발자취도 오늘 그 획을 그었다. 다음 여행지 경남 거창의 감악산 아스타 국화 축제장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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