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수필가 정진해
새벽잠을 설쳐가며 시간을 맞춰 일어났다. 주섬주섬 챙겨 넣은 가방은 무게감이 느껴 온다. 현관문을 나서며 집은 텅 비어 있다. 새벽 5시에 차가 도착하면서 2박 3일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한 차에 모두 6명의 가족이 떠나는 여행이다. 여러 차례 여행했지만, 늘 떠날 때는 설렘이 가슴에 누적된다. 시끌벅적한 이야기는 가을 여행을 더욱 살찌게 한다. 여행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여행지를 향해 달리는 차창 밖은 붉나무잎과 싸리나무잎이 서로 다투며 색을 염색하는 중이다. 가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날은 언제 지나갔는지 까마득히 잊혀 있는 시간이다. 가을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거두어들인다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가을에 끌어들이는 것이 여행이 아닐까, 물음을 던져본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변해 있고 드문드문 비어 있는 논에는 이삭을 줍는 여인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일까 들 수확이 끝나면 아녀자들이 허리에 큰 보자기를 묶고 이싹을 주워 넣는 모습이 보였던 때가 벌써 10년 이상이 된 듯하다. 농사도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했는데, 지금은 기계화로 인해 옛사람들의 농사법도 퇴화하여 새로운 농법으로 농자천하지대본은 어디로 사라진 듯하다.
들을 지나고 산을 지나고 내를 건너는 동안 첫 번째 여행지인 문경새재 입구에 도착하였다. 무슨 날일까 많은 자동차가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문경의 사과 축제가 시작되는 날, 유명 가수까지 온다고 하니 곳곳에서 분홍 옷(이찬원)과 초록 옷(정동원)을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 출렁거리니 축제 분위기가 점점 익어가는 중이다. 우리가 입은 옷 색은 분홍도 초록색이 없어 합류하면 진흙탕 물결이 될 것 같아 걸음을 조령 방향으로 재촉했다. 새들도 넘기 어렵다는 조령은 우리는 문경새재라고 부르고 있다.
조령 관문인 성문으로 가는 길에 문경의 사과를 대표하는 사과나무 앞에 섰다. 헤아릴 수 없을 많이 열린 사과는 만지지도 말고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과이다. 한 나무에 많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붉게 익어 있는 것에 놀라고, 나무의 크기가 문경을 대표할 만큼 커서 놀라고, 문경 사람들의 정성에 놀라고, 나무의 수형에 놀라고, 사과의 향기에 놀라는 여섯 가지의 놀라움을 가진 사과나무 아래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나무 전체가 나오게 한 컷을 담았다.
앞에는 조령으로 가는 길목을 막은 성벽, 그 가운데에 대문과 누각이 한 조가 되어 튼튼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한 발짝 가까워져 오면서 성벽의 높이와 성문의 높이는 점점 높아져 간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 사이에 있는 령이다. 예부터 령의 높이가 워낙 높아서 새로 넘기 힘든 곳이라 하여 붙어진 고개이다. 해발 642m의 고개로, 소백산맥의 조령산(1,017m)을 돌아간다. 옛날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갈 때 가는 길이 3곳이 있었다. 추풍령을 넘는 길과 죽령을 넘는 길, 그리고 조령을 넘는 길이 있었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유생들은 이 높은 조령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게 되면 낙엽이 떨어지듯 과거급제에 떨어지고, 죽령을 넘자는 과거시험에 죽을 쑤는 꼴이 된다고 하여, 굳이 높고 고 험한 조령을 넘었다고 한다. 몇 해 전에 조령을 넘어 보니 힘겹고 외로운 싸움이지만 마지막 관문인 조령관을 나서니 조선의 선비가 되어 과거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다.
새재를 넘을 때까지는 3개의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관문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사람들이 허기를 달래고 쉴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었던 곳이 있어서 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첫 번째 관문인 주흘관을 돌아오는 것으로 하였다. 높은 성벽과 홍예문에 누각을 갖춘 주흘관은 3개의 관문 중에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성문이다. 이곳에 성벽이 만들어지고 성문이 들어서게 되었을 때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이다. 이때 만들어지면서 영조 때에는 조령진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다. 성문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으나 1922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흘관 앞에는 관문교가 놓여 있고 동자석에는 사자상이 올려 있는데 앞의 사자는 밖을 보고, 안쪽의 사자는 주흘관을 보고 있다.
홍예문 위의 누각 추녀 아래에는 주흘관이란 현판을 달았으나 안쪽에는 영남제일관의 또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홍예문 천장에는 부리부리한 눈에 힘차게 뻗은 눈썹과 수염, 칼을 잡고 있는 무사의 상이 그려져 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 좌우에 협문 각 하나씩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개울물이 흘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수구문을 냈고, 성벽 위에는 여장을 두고 근총안과 원총안을 내어 적으로부터 보호와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흘관 안쪽에는 경북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1966년 경북 100주년 기념으로 조성된 광장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세제 계곡 방향으로 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곳에서의 여행은 끝을 맺어야 했다. 못다 답사한 조곡관과 조령관, 주막 등은 다음에 다시 오는 것으로 하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하였다.
예천 용궁면으로 향했다.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아침 겸 점심으로 용궁에서 순대국밥으로 해결하기로 하였다. 식사하기 전에 용궁역에서 12 지상의 용궁 동물상을 둘러보고, 플랫폼에서 옛 추억을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과 저녁, 밤이면 으레 기차가 지나갔던 고양의 집에는 지금도 열차는 달리고 있다. 조그마한 역 망상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내리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열차를 기다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담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 가끔 고모가 열차를 타고 집 옆으로 지나갈 때 손을 흔들어 망상역으로 마중 나오라고 할 때, 고모가 이번에도 맛있는 떡을 가져온다는 반가운 생각으로 역을 향해 뛰었던 그날은 추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용궁마을이 내려다보는 야간 기슭에 누각이 보였다. 여기를 왔으니, 누각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도 용궁을 알 기회이기도 해서 뚜벅뚜벅 걸어서 갔다. 만파루 누각 옆에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며 전국 주요 도로와 해안에 세운 척화비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비석 전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새겨져 있다. 즉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는 내용이다. 척화비 옆에는 이 고장의 좋은 일을 했던 사람을 기념하기 위한 비가 여럿이 세워져 있다. 누각에서 본 용궁면은 조용한 들판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얕은 산이 마을과 사이에 들이 있어 어우림의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박달식당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곳에 그렇게 순댓국이 맛이 있다는 매제와 동행의 추천으로 문을 열었다. 먹고 싶은 것 주문을 하니 상에는 순대와 순대국밥을 중심으로 양파, 고추, 된장, 부추, 김치 소금 등도 함께 차려졌다. 숟가락을 들고 먼저 국물을 맛보았다.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구수하고 진한 맛에 감동되었다. 웃고, 먹으며 하는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릇을 모두 비웠다. 그리고 오늘이 용문 장날이어서 장터를 둘러보는 짧은 시간을 가졌으나 아직 북적거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노점에 물건을 진열하는 중이어서 특별한 물건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발걸음은 시골 오일장 장터를 뒤로하고 쓸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우리는 예천의 삼막문화단지로 향했다. 몇 해 전에 회룡대와 회룡포마을, 삼강주막까지 걸었던 날을 기억에 되살려 삼강문화단지에 도착하였다. 들판이 변해 문화단지까지 되었으니 많은 변화가 앞에 펼쳐진다. 잘 정리된 주차장과 주변의 크고 작은 논과 밭에는 가을이 풍요롭게 물들어 있다. 나무마다 잎에 가지와 줄기와의 이별의 편지를 쓰며 깊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아직 낙엽이 되어 떨어질 날은 더 남아 있지만, 아쉬움을 위한 흔들림은 나무 바람이 아니고 잎의 바람이다. 낙동강을 가로질러 회룡포 마을로 연결되는 산길과의 만남은 조용한 숲길이지만, 먼발치에서 그 길은 나무에 묻혀 찾을 수 없다. 다만, 지난날 이곳을 걸어 건넜던 기억으로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다리 아래 낙동강의 맑은 물속으로 유영하는 잉어의 한가로움은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인다. 흰 구름도 바람에 밀려가지만, 낙동강 물 위에 비친 구름의 형상은 더 빨리 지나가며 깨끗이 씻어 보낸다. 두 팔을 벌려 강바람을 마시고, 두 팔을 흔들어 강물의 흐름을 형상화하고, 우렁찬 뱃노래는 물의 흐름을 의인화하는 시간은 우리 형제들만이 갖는 아름다운 시간이 아닌가 한다.
옛적 아버지가 들려주신 영등땟불놀이 중에 노젓는 소리가 생각난다. “당태실에 목을 메어/ 소나무 고개를 넘어 온다/ 자 얼른땡게라 땡게주게/ 우리 배 짐은 만선일세/ 홍 깃발 청 깃발 뒤에 꽂고/ 얼른 집에 돌아가자/(이하 생략)” 어떻게도 고운 목소리를 치렁치렁 휘감아 공중으로 올라가듯 한 목소리에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이곳 낙동강을 가로진 다리 위에서 형제들의 아름다운 몸짓은 옛 아버지의 정신을 닮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물을 깨끗이 하고, 물을 이용하고, 물로 인해 마음마저 깨끗하고 맑아지기 위한 노력은 누구나 실천해야 할 일이다. 전시관 주변은 휴식 공간으로 정리되어 있어 우리는 삼강문화단지 공원으로 초승달 앞에 앉아서 한 장의 추억이 될 만한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전시관내에 다양한 소개로 물에 대한 홍보와 물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을 관람하면서 중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가득 담아 문을 나섰다. 삼강주막은 얼마 전에 다녀간 여행이라서 다음을 향해 떠나기로 하면서 붉게 물든 담쟁이덩굴 앞에서 가을 손님으로 또 한 장의 추억의 사진을 담았다.
다음 여행지는 우리의 전적지인 임고면 선원1리를 향했다. 예천 섬강주막에서 조금 먼 거리이지만, 선원으로 가는 길목마다 주렁주렁 열려 있는 사과 과수원을 보면서 농민들의 땀 흘린 보람이 얼마나 큰 것임을 알 수 있는 시간이다. 충주에서부터 시작하여 문경과 예천, 그리고 영천에 이르기까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주변으로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 있는 풍경은 우리 집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옛적에 찾았던 원적지에 6촌 재종형제 집을 찾아 들어가니 많은 변화에 알 수 없었다. 마을 회관에 들러 이름을 이야기했더니 나의 항렬에서 하나 아래인 7촌 재종질에 해당하는 분을 만나서 연락이 되어 만나니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석대형님을 만나게 되었다. 10년이 넘었고 15년 정도가 되었을까?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모두 젊은 모습들이었는데 모두 나이가 들어 벌써 80세가 넘고 있다. 반가움에 차 한 잔을 마시고 헤어지는 인사를 해야 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마당을 나와 우리는 옛 당숙께서 운영하시던 절을 찾기로 하였다. 법당으로 가는 길목에 함계정사에 들렸다. 서원 1동에는 여러 채의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그중에서 함계정사는 가정집이 아니고, 누정이다.
함계정사(경북 문화재자료)는 임진왜란 때 호수 정세아 선생의 현손인 정석달 선생이 숙종 28년에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정자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하고 그의 후손인 정일찬이 정조 3년에 중건하여 함계정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정자이다. 건물의 형태는 경사진 대지에 터를 마련하고 건물 1동과 일각 대문 2동으로 구성되었다. 건물 주위로 토석담을 둘렀다. 건물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대지에 남동향을 바라보게 배치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3량 가로 구성한 홑처마 맞배기와집인데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평면 구성은 가운데 대청 좌·우에 방 1칸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으로 전면에 퇴 칸을 마련했다. 측면과 배면으로 쪽마루를 달았으며, 퇴칸 전면과 측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설치했는데 출입은 좌·우 측면에서 하도록 하였다. 구조는 경사지를 적절히 이용해 자연석으로 만든 여섯 벌대 내지 여덟 벌대의 높은 기단을 마련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원기둥을 올렸는데 퇴 칸 전면 기둥 하부에는 누하주를 세웠다. 창호는 온돌방 전면과 측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세살문을 창방 간에는 삼분합 들문을 각기 달았고 대청 배면에는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을 달았다. 방 전면과 측면에 설치한 창호 아래에는 통머름을 설치했는데 문설주를 세우고 견실한 머름청판을 끼운 후 머름중방을 걸었다. 우측 방 배면에는 반침을 마련하고 쌍여닫이 미닫이문을 달았으며 우측 방 배면 상부에는 환기와 채광을 위한 벼락닫이 창을 달았다. 전면 툇기둥 좌·우측으로 설치한 홍살 형식의 가림벽을 설치해 난간 가장자리로 통행할 수 없도록 막아두었다. 건물 아래에는 잡다한 농기구 등이 어지럽게 즐비하여 문화재 관리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함계정사에 법당으로 가는 길은 옛 조상의 묘소가 있는 마을 뒤에서 다시 앞쪽으로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법당으로 향했다. 옛 법당은 철불이 생각나고 절 앞에 큰 느티나무가 생각난다. 선원 1리에서 선원 2리로 이동하였다. 사찰로 가는 길은 옛날을 기억해 내며 걸었다. 옛 초라한 암자 같은 기와집에 철불이 있는 게 전부였다. 철불 앞에 촛불을 켜고 목탁을 치면서 염불하시던 당숙의 모습이 떠오른다. 반듯한 대웅보전에 여러 채의 전각이 있어 옛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누나와 왔던 기억, 그리고 친척이 돌아가셨을 때 왔던 것이 전부였다. 법당의 문을 열었다. 옛 모습 그대로 철불은 중생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이다. 보물로 지정된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이 정식 불상의 명칭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전기에 걸쳐 만들어진 철불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지금의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불을 보는 듯하다. 만들어진 시기는 고려 초기이다. 법당에서 마음의 시간을 갖고 다음 답사지로 출발하였다.
골굴사로 방향을 잡았다. 영천 선원에서 포항 방향으로 가다가 경주 문무대왕면 안동리의 깊은 계곡 방향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이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고, 많은 사람이 서로 바통을 주고받는 듯 내려오고 있다. 우리도 걸었다. 경사진 길은 가끔 쉬었다 갈 수 있는 여유를 “아이구 다리야!”라는 말이 자동으로 입에서 내 뱉는다. 골굴사 하면 선무도가 먼저 생각난다. 선무도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적 방법으로, 요가나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법이다. 우리 몸이 갖가지 스트레스와 육체의 불균형을 선무도 수련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되찾을 수 있는 수행법이다. 많은 젊은 불자들이 굴골사에 와서 선무도를 배우고 있다. 선무도 제복을 입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으며, 법당으로 가는 길목에 선무도에 대한 조각품이나 설명이 있어 수행법이라는 것을 대충 알고 지나간다.
한 번에 쉬지 않고 법당까지 오르기에는 조금 벅찬 길이다. 굴골사에는 6세기경 서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암반 전산에 마의 여래처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 온 석굴이라고 한다. 법당에 거의 도착 할 무렵, 관광객들은 가파른 계단을 따라 마애불을 보러 오르고 있다. 2013년 1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한가하게 혼자서 마애불까지 도착하여 불상을 둘러보고 왔었는데, 오늘은 많은 관람객들이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꼭 오르려고 하는 관람객들은 난간을 잡고 겨우겨우 계단을 오르기도 한다. 법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마애불로 가는 것이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는 것 보다 위험 수위가 낮아 보였다. 난간을 잡고 한발씩 내디뎌 마애여래좌상 앞까지 갔으나, 어떤 공사를 하는지 마애불 앞에 철재물을 엮어서 출입을 금하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파르고 난간이 없으면 발을 내딛다가 어려울 것 같다. 우리 형제들은 오르지 못하고 아래에서 쳐다만 보고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굴골암의 주존불로 암벽 약 4m 높이에 새겨져 있다. 높다란 상투 모양의 머리와 뚜렷한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이목구비와 얼굴 전체가 웃음을 띤다. 전체적으로 신라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옷은 통견이며 옷 주름은 평판을 겹쳐놓은 듯이 두 팔, 가슴, 하반신에서 규칙적인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겨드랑이 사이에서는 V자형으로 표현되어 팔과 상체의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가슴 좌우에는 아래로 처진 옷깃이 보이며 옷깃 사이로 평행의 옷 주름이 비스듬하게 표현되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는 머리 주위에 끝이 뾰족한 홑잎의 연꽃을 배치하여 두광(頭光)으로 삼았다. 두광과 불신 사이에는 율동적인 불꽃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잠시 구조물 사이로 확인된 마애불의 모습이다. 가파른 계단은 난간을 잡지 않으면 내려가기가 매우 위험하다. 조심조심 한 계단씩 내려와 뒤를 보니 바위에 벌집 나듯 얕은 동굴에 불교와 관련된 크고 작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감포항 회비빔국수
우리는 부지런히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감포항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가기로 하였기 때문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늘 가는 코스를 훤히 알고 있는 막내 매제는 정확한 위치를 선점하여 출발하였다. 감포까지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바닷가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바다만 보면 늘 고향에 온 기분이다. 감포항은 조용했다. 많은 횟집은 개점휴업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어느 횟집을 가도 같은 종류의 음식이 차려지는 식당이다. 모두 회비빔국수를 주문하였다. 별미이다. 큰 그릇에 가득 담긴 회와 양념이 올려지고 국수는 별도로 그릇에 담겨 나왔다. 회를 비비고 거기에 국수를 넣어 다시 비볐다. 회 맛이 좋았다. 그것도 모자라 매운탕까지 주문하였다. 회를 만들고 난 후의 뼈와 내장으로 끓여지는 매운탕에도 관심을 두고 함께 먹는 시간은 즐거움이 가득하다.
경주 보문단지 내 소노벨 호텔에서
여름보다 조금 짧은 가을 저녁은 우리를 경주 보문단지에 자리한 소노벨 호텔로 향하게 했다. 토함산이 보이는 터널을 지나 보문단지에 도착하니 해는 지고 어둠이 천천히 찾아들고 있다. 여장을 풀고 오늘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도 우리한테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내일 다시 출발하는 여행을 위한 밤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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