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죽령을 넘었다가 죽령을 넘어 왔다. 오늘(2010.10.3)은 아내의 생일이면서 안동세계탈춤축제 마지막이어
서 아내와 함께 축제장에 갔다. 매년 안동세계탈축제가 왜 그리도 좋은지 함께 어울리면서 동참하다 보니 안동시민의 협동심을
알리는 안동차전놀이와 안동음식대전으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행선 단양휴게소로 향했다. 이곳에는 신라시대에 축성한
테뫼식산성을 있는가 하면 신라적성비가 있는 곳이어서 가끔씩 이곳에 들려 주변의 자연 풍광과 성곽에 대한 새로운 느낌과 역사
적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곤 한다.
적성을 찾아오기에는 단양휴게소가 가장 적합한 곳이다. 마을길을 이용해 찾아들면 찾아오기기 쉽지 않은 곳이다. 몇해전에 전국
산성을 찾아 이곳에 왔었는데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길을 찾아 왔었는데, 어느날 영주부석사를 찾은 후 이곳 휴게소에 들어오니
적성이 보이길래 혹시 산성에 갈 수 없을까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문을 내 놓아 산성을 갈 수 있도록 휴게소에서 배려
를 한 것이다. 오늘도 그 문을 통해 산성을 올랐다.
산성과 신라적성비를 알리는 안내판에서 성곽까지는 400m의 거리이고 산성과 적성비 이정표가 함께 오르는 길을 표시해 두었다. 언제 이곳에 돌을 이용하여 계단을 만들었는지 잘 정비되어 있어 산성을 오르는데 어려움은 없다. 가을이 접어 들면서 주변에는
마뮈하는 야생초의 꽃들이 활짝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주변의 높은 산과 깊은 죽령천, 그리고 고속도로와 철길, 자동차도로
가 남과 북을 연결해 두고 차들이 다리는 것이 눈에 들어 온다. 얼마큼 올랐을까 비각이 보이면서 문화재안내판 2개가 나란히 서서
적성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해 두어 오는 사람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전각내에는 크지도 않으면서 위쪽이 조금 달아나 있으면서, 다듬지 않은 돌에 질서 정연하게 쓴 글이 눈에 들어 왔다. 비의 뒷면에
는 아무런 글자가 없이 원래의 모습대로 다듬어진 그대로 이다. 전각의 앞으로는 멀리 죽령이 보이고 뒷편으로는 오랫동안 자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죽령천변의 집들이 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국보 제198호로 지정된 이신라적성비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표적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이와 같은 일에 충성
을 받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행정 및 형벌에 대한 율령
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되었고, 노역체계,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방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
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이 비를 통해 알 수 있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과 이사부, 비치부, 무력 등 당시의 관등을 보아,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
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글자 하나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기록되어 있는 글자를 읽고 풀이를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이 비에 새겨진 전체의 글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나 지금 남아 잇는 글자수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도록 잘 보
존되고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와 세조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를 처음 발견은 1978년 1월 6일 단국
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발견과정에 대한 일화를 단국대학교박물관장 정영호박사로부터 상세하게 들었던 날이
있었다. 처음 발견하고 그 내용을 보고 신라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는 순간이었다고 감탄 하였다고 한다.
신라적성비(척경비)를 보고 다시 적성을 답사할 수 있도록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북쪽의 성곽 성산로를 따라 죽령천을 내려
다 보며 동쪽의 성길을 걸었다. 아직 이 성곽에서 건물터와 성문지가 어디인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아 아직 발굴이 다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양휴게소에서 보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배의 현상과 같기도 하고 주걱모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잇는 적성은 테뫼식산성으로
성재산 봉을 둘러싸고 있는데 아직 서쪽은 완전히 복원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동쪽과 서쪽에는 큰 하천이 있고 북쪽에는
강물이 흐르는 자연적인 요새처럼 되어 있고 남으로는 낮은 구릉을 지나 험준한 소백산맥에 연결되어 있다. 성내에서 보는 남쪽의
소백산맥의 교통요지를 북쪽까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성의 이름은 지리지에서 성산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초기에는 고성으로 파악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 안에 큰
우룰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적성(赤城)이란 이름은 단양의 삼국시대의 이름이며, 1978년에 단국대학교박물관에서 학술조사
과정에 발견된 단양적성비에서 새롭게 붙어진 산성이름이다.
성벽의 평면형태는 남서쪽의 가장 높은 곳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외향서면을 평평히한 북벽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남향서면을 활모양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성내는 넓은 지대이다. 성돌 하나하는 큰 돌이 아니며 석재를 납작하게 깨어낸 성돌를 크
기가 일정하게 하여 쌓았다.
서쪽에는 치성이 있다고 하나 숲이 우거지고 산물갑시 초소주변에 접근이 어려워 확인할 수 없었다. 동쪽에는 내외면으로 쌓았
는데 내면의 하단에 기초석이 있고 벽은 바깥을 향해 단을 형성하였는데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다. 2년전에 복원해 두었던 부분이
무너졌는데, 지금은 다시 복원되어 있다. 성벽의 두께는 다른 산성에 비해 두꺼운 편으로 약 5~7m정도이다. 내외도 좁은 성벽의
내면높이는 2m 정도이고, 바깥쪽의 보축까지 하면 10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웅장한 성이다.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과과 비슷한 형
태의 성곽이다.
전체적인 성안의 모습은 말안장과 같은 모습이며, 성내의 큰 우물이 잇었다고 하나 주변을 둘러 보아도 우물터가 될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으나 남쪽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억새가 많이 피어 있는데 혹시 우물이 있다면 이곳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곳 성상로에 서서 남쪽 벌리 소백산이 조망되고 그 골짜기로 뻗어 내리는 철로와 일반자동차길과 고속도로, 죽령천, 소백산맥의
준엄한 높고 낮은 산과 그 사이로 자리잡은 집들이 보이는 천혜의 성터이며, 지금의 관광지가 아닌가 한다.
성안에 아름답게 가을을 수놓은 야생초에 눈을 돌려 한컷 두컷 사진을 촬영하면서 내년에도 이 야생초들은 새로운 빛으로 선명한
꽃을 피우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올라왔던 죽령천 돌로 만든 돌계단을 밟고 억새가 나부끼는 가을의 적성길을 걷는다.
[애기똥풀: 6월부터 피기 시작하였는데 아직도 赤城의 성안에서 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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