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를 벗삼아...]
2007년 9월 17일 오전 11시쯤 휴대폰 벨이 울렸다. 오늘은 남산 일원 답사를 하기로한 날이라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답사준비를 위해 교통편도 검색하고, 간편 복장을 위한 준비도 해야 되는 시간이었다. 휴대폰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오형준님 목소리였다. 오늘 2시 답사 전에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12시에 대한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준비를 마쳤다. 그 곳까지 가는 방법이라면 세번의 차를 타는 방법과 한번의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었다. 강서보건소 앞에서 한번으로 갈 수 있는 버스에 올랐는데, 차는 제 속도를 내지 않고 느림보로 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시간내에 도착이 될까 걱정을 하였는데 10분정도 시간이 늦었다. 도착하니 이미 오형준님이 나를 먼저 보고 반갑게 악수하고, 김상태님이 차를 가지고 왔다고 빨리 차를 타라고 하였다. 오형준님 만이 알고 있는 필동냉면집에 들려 점심식사를 맛있게 먹고 동국대학교로 향했다.
동국대로 접어드니 정문으로 향하는 길을 알 수 없어 학생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서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 간 목적은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그곳으로 향했는데 2층이 박물관 전시실이라고 하기에 안내장 한 장 들고 2층 전시실에 오르니 전시물은 관람하기 적당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좌측으로 도는데 그곳에 우리보다 먼저 홍인화님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었다. 오형준님과 김상태님께 홍인화님이 여기 있으니 올라오라고 하고 전시물을 관람하였다.
[보협인석탑]
사진속에서만 본 보협인석탑이 중앙에 전시되어 있어 그 동안 실물을 보지 못해 매우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는데 여기서 실물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보협인석탑이란 '보협인다라나경'을 그 안에 안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인데, 유래는 '중국 오월이라는 나라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 4천기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고사를 본따 금, 동, 철 등의 재료로 소탑 8만 4천기를 만들고 그 속에 일일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하였다.' 라는 데서 유래가 된 것이라 한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 탑은 충북 천안시 북면 대평리 탑골계곡의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세운 것인데 복원된 탑의 현재 모습은 5개의 돌만 남아 있어 완전한 형태는 아니며, 일반형식의 석탑과는 전혀 달라서 기단과 탑신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완전한 형태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뚜껑을 덮은 듯한 네모난 상자 모양의 돌 2개를 포개어 놓은 후, 그 위로 귀를 세운 머리장식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불상이 새겨진 육면체 위에 4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육면체가 놓이는데 4면에 부처님의 전생설화가 새겨져 있으며, 이 탑몸돌 윗면 중앙에는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 사리구멍이 남아있다. 이 보협인석탑은 국보 제209호 지정도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파초도] [국화도]
또 다른 전시품 중에는 "정조대왕필파초도"가 전시되어 있다. 이 파초도는 보물 제74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이곳에 전시된 파초도는 먹색의 짙고 옅은 정도 및 흑백의 대조가 바위의 질감과 파초잎의 변화를 잘 표현되어 있는 그림이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 정조의 호인 ‘홍재’가 찍혀 있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 독창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이 그림은 정조의 모습과 남종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국화도(보물 제744호)와 함께 조선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몇 십점의 전시물을 관람하고 숭정전으로 향했다. 숭정전으로 지난 해 가을에 이곳을 찾아 숭정전의 구조적인 면을 꼼꼼이 살핀 적이 있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이곳을 답사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답사는 2시에 동대전철역 6번출구에서 만나 동국대 교내에 위치한 숭정전(정각원), 장충단, 수표교, 남산성곽, 남산,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답사이다. 답사 해설은 유승일님께서 해설을 맡으셨다. 동대박물관에서 나온 우리 4명은 시원함을 달래기 위해 교정의 나무그늘 아래로 걸어가는데 많은 젊은 대학생들의 벤취 좌담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옛날 대학생 시절을 연상하면서 젊은 그들의 대화가 나의 오늘을 힘차게 답사를 할 수 있는 작은 힘을 실어준 것만 같았다.
[정각원]
정각원에 도착하였다. 신발을 벋고 내부로 들어가 내부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숭정전이란 편액은 내부에 걸려 있었고 천정은 그 오랜 세월에 그 형태를 잃어가는 것 같았다. 이곳 저곳 모두 둘러보고 나와서 외부 구조를 둘러보았다.
[정각원 내부에 걸려있는 숭정전 편액]
이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인데, 조선 광해군 때인 1617년부터 1620년 사이에 지어져서 290년간 조선시대 궁궐의 이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세워지면서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자 숭정전을 1926년에 조계사로 이전되었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으나 건물이 낡아서 이전이 어렵게 되었고 경희궁 복원 당시 숭정전을 정면 5칸, 측면 4칸에 기둥이 있는 위쪽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에 팔작지붕으로 대궐의 정전다운 품격을 갖춘 숭정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숭정전(정각원)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 보호 관리되고 있다.
숭정전을 모두 답사하고 내려와 벤취에서 김상태선생이 준비해온 사과를 나눠 먹고 있는데 유승일님의 인솔하에 전문향 답사팀이 숭정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문화재안내판 앞에 모두 모여서 유승일님의 해설을 듣고 모두 숭정전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벤취에 앉아 먹다만 사과를 먹으면서 답사간 전문향 회원들이 내려올 때를 기다렸다. 어느 님은 맛있는 센드위치를 해 오셨다. 한 개 먹어보니 매우 맛이있었다. 두개를 먹으려고 하여도 없어서 먹지 못하고 다음 답사지로 향했다.
[장충단 표지석]
장충단공원 벤취에 앉아 유승일님으로부터 장충단에 대한 해설과 수표교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 해설을 들으니 다음 답사지로 갈 생각이 없었다. '자! 장충단비로 갑시다.'라는 소리에 움직였다. 장충단비 앞에서 보충 해설을 해 주셨다. 장충단비는 서울유명문화재 제1호로 지정 보호 관리되고 있다. 이 비는 광무 4년(1900) 고종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장충단은 조선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사한 홍계훈, 이경직 및 여러 신하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장충단비]
비의 앞면에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이다.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이 비를 뽑아 버렸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시설들을 마구 설치하여 ‘장충단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수표교]
해설이 끝나고 다시 수표교를 건너 개천이 흐르는 수표교 다리 아래로 내려 갔다. 모두 하천 돌 구조물에 앉아 추가 보충 해설을 들었다. 수표교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 수표교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세종 23년(1441) 수표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표:세종대왕기념관 앞]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이 수표교는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서울성곽: 신라호텔입구~남산]
이제 가장 많은 달품을 팔 서울성곽중 남산에 축성된 성곽 답사 차례가 왔다. 서울성곽은 서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으로,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동의 흥인지문·서의 돈의문·남의 숭례문·북의 숙정문인 4대문을 두었고, 4대문은 동북의 홍화문·동남의 광희문·서북의 창의문·서남의 소덕문인 4소문을 두었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장충동에서 시작되는 남산 성곽부분 내에는 성문이 없는 곳이다.
[慶山이라 표기된 글자]
이곳부터는 축성된 가장 아랫단이나 아니면 2단에는 지방별로 축성된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런데 꼼꼼이 들어다 보면 모두 경상북도 경주, 흥해, 경산 등의 지역명이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신라호텔 입구에서부터 버티고개 정자까지의 답사를 모두 마치고 다음 코스인 남산 봉수대로 향했다.
남산봉수대로 향하기 위해 노란색 버스에 오르니 구불구불한 남산길로 향했다. 남쪽 저 아래엔 한강이 소리없이 흐르고 오가는 자동차는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향하고 있고, 드문드문 소나무가 애국가를 상징하듯 서울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끊어진 성곽을 지나 하차였다.
[남산 팔각정]
한참 걸어서 남산의 정상인 팔각정 앞에 모두 모여 유승일님의 해설을 듣고 이동하였다. 먼저 간 곳은 국사당이 있던 터이다. 국사당은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게 되자 해체하여 종로구 무악동 산2-12의 자리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남산 봉수대, 일명 경봉수대]
바로 옆에는 봉수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의 구조물이다. 남산 봉수대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설치하여, 갑오경장 다음해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어 왔고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대라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 하여 경봉수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봉수의 횟수는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도달하게 되는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여 5개소가 있었다 하는데, 현재 봉수대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 자리를 확인할 수는 없는데, 『청구도』등의 관련자료를 종합하여 1개소를 복원하였다. 이곳은 서울기념물 제1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한옥마을 안내도]
남산 답사를 모두 마치고 다시 차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이동하였다. 다음 갈 곳은 한옥마을이다. 차를 잘못 타서 남산 김구선생 동상 부근부터 한옥마을까지 줄기차게 걷기 시작하였다. 남산 주위를 한바퀴 돈 셈이다. 한옥마을 작은 바위나 나무 의자에 앉았다. 한참을 쉬고 나니 뒤따라 온 님들이 모두 도착되자 답사지로 옮겼다. 먼저 간 곳은 구수하게 냄새가 풍겨 나오는 서울시민속자료 제20호 도편수이승업가옥에 도착하였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 때 목수의 우두머리 격인 도편수를 맡고 있던 이승업이 1860년대에 지은 집이며, 원래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있다. 안채는 ㄱ자형 집으로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이 있고 꺾여서 부엌이 길게 있다. 건넌방은 대청의 오른쪽에 있는데 앞뒤를 갈라 2개의 방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지붕인데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은 모양을 하고 있다.
[디딜방아]
다음에 간 곳은 골목길을 접어드니 서울민속자료 제8호인 오위장김춘영가옥의 안내판이 나타났다. 모두 읽어 보니 조선 후기에 오위장 벼슬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에 지은 집으로, 지금 건물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한옥마을로 옮겨 복원한 것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대문채와 연이어 돌출되어 있으며 사랑방·대청·건넌방으로 짜여있도,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서울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건넌방, 왼쪽에 안방·부엌·마루·광을 두었다. 대문에 들어서서 왼쪽에는 문간방이 1칸 있다.
[부엌]
쪽문 같은 대문을 나와 이번에는 서울민속자료 제18호인 부마도위박영효가옥으로 들어 갔다. 이 가옥은 영혜옹주와 결혼한 조선 철종의 사위 박영효(1861∼1939)의 집인데, 원래 종로구에 있었는데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이 가옥의 구조는 대문간 옆에 2칸 온돌방과 그 옆으로 6칸 이상 되는 부엌이 있고, 부엌 옆은 안방인데 앞쪽에 퇴가 있고 뒤쪽에도 퇴칸과 조그만 방이 있다. 안방 옆은 2칸 크기의 대청이고 옆으로 방들이 딸려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대청이 있으며 창호는 유리문인데 후대에 새롭게 고친 것이다. 답사시간이 촉박해지면서 모두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장독대]
부마도위박영효가옥의 옆 협문을 나오니 서울민속자료인 해풍부원군윤택영택재실이 접해 잇었다. 이 건물은 조선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지은 집으로,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것을 1996년 남산골 공원을 만들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집 뒤에 있는 사당은 4·19 때 소실된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본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면을 으뜸 원(元)자 모양으로 꾸민 이 집은 제일 위에 사당을 배치하고 본채를 두었으며 본채 앞에는 대문을 두고 그 옆에 행랑채를 두었다. 본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누마루 등을 배치하였고 사당은 1칸 집으로 본채보다 두 단 높여 지었다. 원래 사당은 임금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윤덕영이 경운궁을 헐 때, 그 재료들을 이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장독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속에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정정임님이 장독대 사이로 다니면서 하나하나 열어 보고 있는 모습이 도시속의 조선의 여인 같았다.
[추녀 구조]
다시 문을 나서서 오늘 마지막으로 답사할 순정효황후 윤씨친가옥으로 향했다. 한창 촬영준비를 하느라 바쁜 곳에 우리가 들어가 유승일님의 문화재해설 들었다. 이 건물은 조선조 제27대 순종의 황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13세(1906) 나이로 동궁계비에 책봉될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윤씨가라고도 한다. 이 집은 종로구 옥인동 47-133번지에 있는데 집이 너무 낡아 옮기질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 떠 이곳에 복원하였다. 집의 평면은 ㄷ자형 몸채 앞쪽에 사랑채를 두어 전체평면은 ㅁ자형이다. 몸채와 사랑채 쪽은 지붕에 단차이를 두었으며 사랑채 대청부분은 바깥에서 볼 때 중층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것은 지형을 살린 구성이다.
[이제 이 문이 닫히면 이곳도 내일을 기다리겠지...]
이렇게 하여 이곳 한옥마을의 4채의 가옥을 모두 답사를 마치고 모두들 다음 기착지로 또 이동하였다. 조용하기는 켜녕 오가는 차 소리를 들으면서, 날은 저물어 가로등 불빛이 곧 나오기 시작할 때 전문향회원 모두 평래옥에 올랐다. 푸짐한 초개탕이 나왔다. 오늘의 답사를 마무리 하는 시간이였다. 모두들 잔에 가득히 부은 각종 水를 담은 잔을 들고 '좋다'라는 큰 여운을 남기고 하루의 답사를 마치고, 명동에서 1만원짜리 흥을 돋우면서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한 골목길의 포장마차에 앉아 오늘의 답사를 정리하면서 간단한 수질검사로 답사의 큰 틀을 다시 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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