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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답사기]대전의 무너진 산성을 찾아서

문화재해설관/ 문화유산답사기

by 국보와 보물 2007. 2. 2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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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무너진 산성을 찾아서... [글쓴이 정진해] | (공모작)문화재수기 2006-10-10 21:08  | 조회수 37
관리자

  2006년 4월25일 동쪽에서 밝은 빛이 창을 뚫고 아침을 알린다. 4월 14일에 이어 오늘도 대전에 있는 산성을 답사코져 떠나기로 아내와 약속을 하였다. 모두 6곳의 산성을 답사하기로 하고 등산 준비를 마치고 대전으로 출발하였다. 평일이고 출근시간이 시작되는 때라서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다. 가양대교를 지나 내부순화도로를 타고 구리톨게이트로 향했다. 늦게 출발하면 6개의 산을 오르기에는 힘이 부칠것 같아서 일찍 출발을 한 것이다. 출발한지 2시간이 경과하여 대전IC에 도착하였다. 가장 먼저 답사할 곳은 백골산성이었다. 대전IC로 나와 옥천으로 가는 방향에서 어부동마을로 좌회전하여 김정선생 사당을 지나고 사성동 애향탑을 지났어도 백골산성 푯말이 없었다. 다시 차를 돌려 신하동에서 마을 주민께 백골산성을 여쭤 보았더니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찾아갈 일이 큰일이다. 집에서 인터넷상의 자료를 검색하였지만 사성동 애향탑에서 가는 길이 가장 쉽다고 하여 이곳에 도착하였으나 주민들도 알지 못하는 산성이었데, 대전시에서 올라가는 이정표 하나를 해 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런 이정표는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차를 애향탑을 지나 기도원 앞에 도착하여 지도를 펼쳐 그 위치를 찾고 있는데, 배낭을 진 노인이 차를 세우더니 함께 기도원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 노인께 백골산성을 아시냐고 물었더니 산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도원 앞산이 백골산이라고 하셨다. 200여m를 가니 기도원이 있었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노인께서 산속 기도하러 가신다고 하기에 나와 아내는 배낭을 짊어지고 노인을 따라 갔다. 한참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노인께서 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백골산성은 대단히 험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는 글을 어디에서 읽어 보았다. 초입부터 매우 험난하였다. 전체 거리의 5분의 1정도 올라가니 길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내 스스로 길을 만들어 산행을 해야 할 판이었다. 아내는 따라오면서 하산하고자 몇 번을 재촉하였다. 지난 4월 14일에는 그래도 오르기 쉬운 산성에 올라갔었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하산하려고 하였으나 가야할 곳은 꼭 가 보아야 한다는 그 신념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면서 몇 번이고 미끄러져 원래 위치로 되돌아오는 그런 길이였다. 40분 정도의 시간을 지났을까 산 능선에 오르니 발자국도 없는 소로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되었을까,  수많은 나무가 잘려 희미한 길을 막고 있었다. 두 봉우리 중 어느 곳에 산성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먼저 왼쪽 봉우리를 가기로 하였다. 길은 없고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어 전진하기에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지,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떤 말을 던져야 할지 많은 생각이 뒤따랐다. 아내는 뒤를 따라오면서 길이 없는데 무슨 산성이 있겠느냐고 하산하자고 재촉을 하였지만 이곳까지 올라와서 꼭 보고 싶은 산성을 보지 못하고 그냥 하산 한다는 것은 내 사전에 없는 일이라고 하고는 계속 전진하였다. 약 20분이 지났을까 산봉우리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산성이란 그 작은 돌 하나도 없었다.  다시 돌아 다음 봉우리를 간다고 하니 아내는 혼자라도 하산 하겠다고 계속 재촉을 하였다. 그럼 혼자 하산하라고 하였지만 이 깊은 산중에 혼자 움직이기에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다음 봉우리를 가기로 하고 왔던 발자국을 따라 다시 되돌아 맞은편 봉우리에 올라갔다.  백골산이 얼마나 험한 산세인지 아는 사람은 이곳을 올라오지 않을 것인데 나와 아내는 이곳이 이렇게 험한지 알지 못하였기에 올라온 것이다. 산봉우리에 올라서니 산 아래에는 대청호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호수에는 가뭄으로 인해 물은 산허리에 테를 만들어 놓았다. 그 사이에 작은 유람선이 밀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면서 가장 멀리 보이는 곳으로 가 보았더니 그 곳이 옛 성터 자리였다. 숲이 우거져 성터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축조되었으며 그 둘레가 약 400m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까닭에 완전히 무너져 내려 원래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석축이 무너진 곳은 사람이 오르고 내려가기에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답사를 끝내고 하산하는 길에 봄을 기다렸던 야생화들이 자기만의 자태를 자랑하기에 하나하나사진으로 남겼다. 하산 하면서 많이 미끄러져 종아리에는 작은 나무 가지가 그려 놓은 상처가 남았지만 답사의 보람을 느끼게 하였다.


  다음 찾아갈 곳은 대전 동구 삼괴동 닭재에 있는 계현산성이다. 판남IC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남대전IC로 빠져나와 주부방향으로 국도를 달리다 보니 도로상에 닭재길이라고 방향 이정표가 있었다. 마을길을 접어들어 차를 주차시켜 놓고 밭일을 하신 할머니께 닭재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닭재는 왜 가느냐고 하셨다. 산성을 찾아간다고 하니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이라고 하셨다. 2대의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올라갔다. 좁은 소로를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니 계현산성 안내판이 있었다. 더 올라가니 닭재약수터 이정표가 있었다. 그 주위에 누가 차곡차곡 쌓았는지 2개의 돌탑이 서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아내는 야생화에 푸욱 빠져 뒤따라오지 않고 야생화를 사진기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닭재 이정표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니 산성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소로를 따라 올라가니 남쪽벽이 보였다. 남문터로 보이는 곳을 올라서니 넓은 터에 북쪽에 장대로 보이는 석축이 일부분 둘러져 있다. 그 뒤 북쪽벽은 많이 무너져 있었다. 이 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었으나 남동쪽의 성벽 일부분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밑에서 1.8m까지의 성벽은 안으로 약간씩 오므리며 쌓다가 그 위 1.5m 정도의 성벽은 거의 수직으로 쌓았다. 주위에는 기와 조각이 보여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부분부분 모두 사진으로 담고 하산하면서 다시 자태를 뽐내는 구슬봉이, 양지꽃, 제비꽃, 봄맞이꽃 등등 많은 야생화를 사진에 담았다.  이 야생화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야생화도감"을 만들어 소개하고자 한다.

마을을 내려오니 아직 할머니는 밭에서 밭일을 계속하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쉽게 찾았냐고 물으셨다.


  이번에는 차를 대전 동구 이사동 해발 300m 비파치 고개의 서쪽 정상에 위치한 백제시대에 축성한  비파산성(소호동산성)으로 향했다. 마치 대관령 같은 길을 구불구불 올라오니 비파치 고개 정상이었다. 멀리 보니 안내판이 보였다. 아내는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차를 끌고 다시 오던 길로 가고, 나 혼자 산성으로 올라갔다. 매우 가판른 길이여서 많이 미끄러졌다. 올라가는 길은 어떻게든 올라가지만 내려오는 길이 더 걱정되었다. 산성은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이 산성의 둘레는 약 350m정도 이르며, 성벽은 남문터로 올라오는 왼쪽 바깥벽 아래에 2~3단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부분이 일부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 허물어져 성을 쌓은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성 내부 평평한 곳에는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고 북벽 정상에는 봉수대로 짐작되는 터가 있으며, 문터는 북벽에 붙어서 시설되어 있는 서문터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 이곳에 죽은이가 묻혔는지 누구도 손볼 후손이 없는 무덤이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하였다.


  아내가 마련해온 만두로 배를 채우고 멀리 서구 봉곡동에 있는 고무래봉을 찾아 떠났다. 비파치고개에서 20여km를 가니 흑석동역이 보였다. 자료에는 흑석동역 서쪽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있는 산성이라고 하였다. 농노길을 따라 올라가니 비닐하우스 2채가 있었다. 차를 주차시키니 비닐하우스 주인이 ‘이곳에 어떻게 오셨냐’고 하시기에 ‘산성을 찾아 왔는데 어디에 있는지 아시냐’고 하니 길을 가르쳐 주셨다. 어느 산성을 가도 산성으로 가는 길은 급경사가 심하다. 이곳 흑석동산성도 예외는 아니였다. 성터에 올라서니 석축은 무너져 그 형체를 알 수 없었다. 성은 외벽만 석축을 쌓았지만 성 안쪽은 흙과 잡석이 섞어 채우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석축산성이었다. 이곳에서 호남선 철도와 대전에서 연산에 이르는 도로가 내려다보이는데 당시의 길목을 감시할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였다. 산성 부분부분을 사진 촬영하였다. 하산하면서 산나물이 띄엄띄엄 나 있기에 한 끼의 봄맛을 느낄 수 있을 양 만큼 채취하여 내려왔더니 아내는 벌써 봉지에 4 가족이 한 끼 먹을 수 있는 양의 산나물을 채취하여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 하는데 길을 가르쳐 주신 아저씨께서 '산성에 벌써 갔다 왔느냐'고 하시면서 '산을 날아다니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흑석동산성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유성구 안산동에 위치한 안산동산성이었다. 안산동산성은 안산동과 공주 반포면 사이에 있는 해발 226m 고조산 정상에 축성한 석축산성이었다. 둘레는 약 700m 정도가 될 것 같았다. 공주방면으로 가다 좁은 농노길을 접어들어 비포장도로를 가다 보니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꼬불꼬불 나 있었다. 차를 몰아 산성 앞까지 올라갔다. 높이 쌓아 올린 성벽이 무너진 곳도 여러 곳 있었다. 산성을 올라가는 길을 따라 가니 넓은 성내 중앙에 덕진산성단(德津山城壇)있었다. 이 산성은 지형을 따라서 쌓아 3층의 계단 모양으로 만들어 3중의 산성처럼 보이는데 백제 때 축성된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안쪽 성벽은 높이 1.1m, 바깥쪽 성벽은 높이 6.3m이며, 성안의 가운데에는 둥글게 쌓은 곳이 있는데 그 중앙에는 묘가 있다. 이곳이 창고터로 여겨지며, 북쪽으로 통로가 있었다. 지리적으로 대전에서 조치원간의 도로가 잘 보이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중요한 산성으로 여겨지며 군사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둘러보고 또 사진으로 담았다. 안산동산성 주위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많은 사람들의 자연 휴식장소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고증을 거쳐 모두 복원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대전에 있는 마지막 산성으로 가기 위해 금남면 소재지를 경유하여 부용면 검호리를 갔었다. 이곳에서 강 건너편에 있는 소문산성은 갈 수 없었다. 길을 잘못 찾아 온 것이다. 다시 오던 길을 가서 금남면 대박리와 유성구 신동 경계선상에 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배나무과수원 주인께 소문산성 위치를 여쭤보니 가르쳐 주시면서 가는 길은 없는데 찾아가기에는 별 무리는 없다고 하셨다. 카메라 1대는 목에 걸고 또 한대는 손에 들고 산성을 찾아 갔다. 베어 놓은 나무를 옮겨가며 산성에 도착하였다. 이 산성은 해발 200m의 꾀꼬리봉 정상에 축성된 테뫼식산성으로 성벽의 둘레는 약 350m 정도이다.  성의 평면은 거의 원형에 가깝고, 성벽이 통과하는 지점은 안쪽에 5∼10m의 평탄한 지형이 있고, 성벽 바깥 높이는 5m 내외로 추정된다. 동쪽 벽과 남쪽 벽의 허물어진 곳을 보면 1∼4단의 석축 아래가 흙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원래의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축이고 후대에 돌로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폭 4m의 남문터와 폭 3m의 동문터가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건물터를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동쪽벽 가까운 곳에 지름 3m의 우물터가 한 곳 있는데 아직도 촉촉히 젖어 있었다. 모두 사진을 촬영하고 오르던 길을 따라 하산하였다.

  산성에서 내려와 서울 집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배나무과수원 아저씨께서 오셔서 '잘 찾아 갔느냐'고 하셨다. 2006년 2월 21일부터 대전광역시 문화재 답사를 시작하여 4월 25일 오늘 6곳의 산성 답사로 7차례에 걸쳐 모두 끝냈다. 직접 내 눈으로 문화재를 확인하고 문화재의 가치성, 역사성, 보존성이 얼마나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대전광역시의 답사에 함께 동행했던 아내는 다음에는 어느 지방의 문화재 답사를 시작하느냐고 한다. 하늘이 맑은 날씨만 준다면 언제든 답사를 한다고....

글내용과 관련된 핵심 키워드 대전,   백골산성,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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