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이 시작되었다. 매년 정초가 되면 한양도성을 걸었다. 계묘년도 예외는 아니다. 출발은 옛 돈의문 터(서대문)에서 시작하였다. 홍난파가옥, 달쿠사, 권율 장군집터를 둘러보고 사직터널 위에서 시작된 성곽은 주택가로 이어졌다가 본격적인 도성은 인왕산 유아숲체험원에서 시작되었다. 계단 따라 하나, 둘, 셋을 헤아리며 첫 번째는 70계단에서 잠시 쉬어 숨 고르기를 하고 다시 걷지만, 오를수록 계단의 수가 줄어들면서 쉬었다가 가는 횟수도 늘어났다.
홍난파 가옥
델쿠사
성안의 풍경과 성 밖의 풍경은 옛 도읍을 정할 때 이곳에 얼마나 아름다운 곳임을 짐작게 한다. 성밖에는 괴이한 선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무학대사는 도성을 축성할 때 선바위가 성안에 두기를 원했지만, 정도전은 불교가 유교보다 성하지 않도록 선바위를 도성 밖에 두는 것을 원했다. 두 사람의 게임을 해결한 사람이 태조였다. 정도전이 태조를 설득하여 선바위를 도성 밖에 두기로 하고 지금의 한양도성이 축조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인왕산 도성
선바위
한양도성은 1396년 1월과 8월에, 두 차례 공사를 통해 평지에는 토성을 쌓고 산지에는 석성을 축조하여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에 와서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축성하였고, 숙종 때에 와서 무너진 구간을 재정비하면서 성돌의 크기를 규격화하였다. 마지막으로 순조 때에 와서 숙종 때보다 더 큰 성돌로 규격화하여 재정비하였다.
한양도성에서 최고의 난코스는 인왕산 구간과 백악산 서쪽 구간이다. 인왕산 구간을 오르다 보면 기이한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힘들어 오르면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며 여기를 오를까”라는 생각하다가도 주변의 기이한 바위를 보고 있으면 힘든 것이 모두 사라진다. 정상에 오르면 천하가 내 발아래 있어 한 마리 학이 되어 멀리 옛 심악산(심학산)까지 날아가고픈 꿈도 갖게 된다.
인왕산 정상에서 가파른 성상로의 계단을 내려서면 풍수지리상 늘 닫아 두었던 창의문을 만난다. 인조반정 때 문을 부수고 들어 왔던 역사의 사건이 머문 곳이다. 창의문의 특이한 것은 바깥의 누조 바닥에 수(壽)와 복(福)이 새겨진 것과 서인들이 북인과 광해군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인조반정 때의 공신 명단이 적힌 개판이 걸려있다.
창의문에서 백악산 정상까지는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곳이다. 관리소를 지나고부터 인왕산을 오를 때보다 더 힘들게 올라야 했다. 50여 계단을 오르고 쉬는 횟수가 반복되면서 천천히 올라 돌고래 쉼터에서 쉬면서 왔던 길 뒤 돌아보니 또 한 번의 감탄이 절로 났다. 내려왔던 도성이 보이고 흥선대원군 이응하의 별장인 석파정이 눈에 들어온다. 노송이 그늘을 드리우고 계류 가운데에 평대를 쌓고 서양식 건축기법이 더해진 관풍루가 자리하고 있는 사계절 풍광이 넘쳐나는 곳이다.
정상으로 오를수록 가파른 경사는 몸을 누군가가 뒤를 당기는 듯한 느낌으로 전신을 오싹하게 한다. 쉬지도 않고 올라 백악쉼터에서 또 한 번 쉬었다. 이 쉼터에서 배낭 깊숙이 넣어둔 따뜻한 물 한잔을 하고 찬바람에 땀까지 식혔다. 멀리 있어도 가까이 보이는 듯한 주변의 높고 낮은 산, 고을마다 흰색의 아파트, 소똥구리만큼 작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까지 동화 속의 숨은 보물과도 같아 보이는 풍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생각도 없게 만든다.
가파른 성상에 다시 땀으로 얼룩져가며 백악산 마루에 도착하여 남쪽과 동쪽의 도심을 둘러보고 걸음을 재촉하여 도성의 사대문 중 북문인 숙정문에 도착했다. 옛 조선시대에 창의문처럼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나 문밖에는 신작로도 없이 오솔길뿐이다. 말바위 쉼터, 와룡공원, 성북동 돈가스 거리를 지나서부터 걸음은 성 밖으로 이어진다. 성벽은 많은 가옥으로 성체가 없어진 곳도 있고, 가옥의 기단석, 돌담, 일부 구간은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있다. 도성 사소문 중 동북쪽에 위치한 혜화문은 조선 초기부터 속칭으로 동소문이라 불리었다. 이 문은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을 했으며 현재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혜화문
혜화문의 남쪽 성벽은 바로 낙산과 연결되었으나 도로 사정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낙산을 오르는 성벽은 태조, 세종, 숙종, 순조에 이르기까지 보완 되었던 성벽의 성돌을 모두 확인할 수 있어 우리의 축성 기술을 볼 수 있다. 낙산에서 이어진 성벽은 흥인지문(동대문) 전에 도로 사정으로 성벽은 연결되지 못했다. 흥인지문만 도로 가운데에 자리한다. 도성 사대문 중에 유일하게 옹성을 갖춘 문이 흥인지문이다. 도성은 옛 동대문운동장 터로 이어지면서 성곽을 발굴하여 모습을 드러냈고, 한양중학교에서 흔적을 감추고 광희문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옛 광희문은 남소문으로 시구문이라 불렀었다.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에서 죽은 시신이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다.
낙산으로 연결된 도성
흥인지문
도성은 다시 150여m 이어지다가 성북동 성벽처럼 주택가로 사라진다. 장충동체육관 동쪽 편에서 성벽이 다산팔각정 앞까지 이어지면서 축성의 실명제가 실시되었음을 보여주는 지명 각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졌다. 태종부터 순조에 이르기까지의 축성법도 확인할 수 있는 코스이다. 이 성벽을 지나 도로를 건너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의 김용한 지사의 동상을 지나칠 수 없었다. 국립극장 옆 남산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용트림의 성벽을 접했다. 또 계단이다. 이곳부터 성벽은 자연석을 적당한 크기로 축성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의 각자에는 공사감독자와 전문 석수의 이름이 기록된 성 돌이 있다. 이렇게 새겨진 도성의 성돌은 모두 280개 이상을 보고 있다.
남산으로 이어진 도성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도성
가파른 성벽을 끼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성벽을 넘는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왔던 주변을 둘러보고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남산 타워 방향에서 성안을 걷는다. 남산 팔각정과 옛 국사당 터, 목멱산 봉수대를 둘러보았다. 원래 목멱산에는 다섯 곳의 경봉수대가 있어 다섯 봉수 노선에 최종적으로 받은 결과를 승정원에 보고되었는데, 현재의 봉수대는 <청구도> 등의 관련 자료에 의거, 한 곳 복원되었다.
남산으로 이어진 도성
남산팔각정
목멱산 봉수대
도성은 남산도서관 옆까지 연결되고 다시 남산공원 김구 선생 동상 앞에서 숭례문까지 이어지는데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도동삼거리에는 숭례문 전까지 이어지다가 도로가 있는 곳은 복원되지 못하고 숭례문에 이른다. 숭례문이 불타기 1주일 전에 가까이에서 부분 사진 촬영을 하였는데, 화재가 난 후 복원하면서 일부의 사진이 필요해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남대문에서 빌딩 사잇길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정동제일교회,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총 6시간에 걸쳐 여정을 끝냈다. 한양도성을 답사 목적으로 돌아보면 많은 문화재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과 함께 답사하며 담아 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모두 풀어헤쳐 보고자 한다.
숭례문으로 연결되는 도성
사라진 오가피나무 둥지 속 뱁새 가족 (0) | 2023.09.08 |
---|---|
활시 -4집- (1) | 2023.07.30 |
한강에 살고 있는 물고기 이름 알려 주세요. 인어공주님! (0) | 2017.01.09 |
[스크랩] 정진해의 옛 생활문화 이야기-야생화와 전통문화의 만남 (0) | 2014.03.12 |
[스크랩] 박물관의 불수감과 밤나무 이야기 (0) | 2014.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