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두 신을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다.
조선 초기의 사직단은 한 가운데에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너비는 2장 5자이고 높이는 3자였다. 유의 한쪽 면의 길이는 25보(步)였으며,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다. 그 외곽에 다시 네모난 담장이 둘러져 있고 사방에 홍살문을 두었다.
홍살문은 모두 문이 하나인데 담장의 북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이 출입하는 문이므로 격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유의 바깥 서남쪽에 신실(神室)이 있고 유의 북문과 담장의 북문 사이에는 국왕이 서 있는 자리인 판위(版位)가 있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건물은 모두 불타버리고 단만 남았다.
신위는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묻어 보관되었다가 평양으로 옮겨졌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세자가 받들고 황해·강원도 등으로 다니다가 환도해서는 심의겸(沈義謙)의 집에 종묘의 신위와 함께 모셨다.
1596년(선조 29)에 신실을 지어 봉안하였다.
1783년(정조 7) 편찬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의 「사직서전도(社稷署全圖)」에 의하면, 서쪽에 제기고, 재생전, 전사청, 잡물고, 수복방 등이 위치하고 동쪽에 악기고, 안향청, 차장고, 악공청, 부장직소 등이 위치한다.
현재 사직단의 서쪽에 여러채의 건물을 복원하였고, 동쪽에는 복원을 위한 작업이 직행중이다.
사직에 제사드리고 관리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고 세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사직 제사는 1년에 3번, 봄·가을 납일(臘日)에 제사를 지내고, 기고(祈告) 제사도 사직에서 지냈다.
<눈 덮인> 창덕궁 승재정 풍경 (0) | 2023.02.05 |
---|---|
<눈 덮인> 창덕궁 애련정 풍경 (0) | 2023.02.03 |
파주 장릉 (0) | 2023.01.05 |
포천 반월성 (0) | 2023.01.03 |
<정진해의 국보와 보물> 신미양요 때 백병전을 치룬 현장 광성보 (0) | 2023.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