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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찾는 사람들-낙안성 초가집 울엔 능소화가 피고

문화재해설관/ 문화유산답사기

by 국보와 보물 2008. 7. 19.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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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성 초가집 울엔 능소화가 피고

차는 쉬지도 않고 계속 목적지인 담양으로 향했다. 익산을 지나면서 도로에서 가깝게 보이는 익산미륵사지, 익산고도리석불입상, 익산왕궁리5층석탑은 이곳이 백제의 영토임을 알 수 있는 많은 문화유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양사, 선운사, 고창읍성 등등의 이정표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13시에 전남도립대학에 도착하기로 하였으나 30분이 경과하여 도립대학교 정문을 접어들었는데, 우리를 태우고 가야될 버스는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차는 학교에 주차시키고 모두 준비해간 가방 한 개씩 들고 차에 올랐다. 차는 출발하여 곡성휴게소에 도착하니 곳곳에서 출발된 버스 5대가 곡성휴게소에 도착되었다. 우리는 정상적으로 도착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점심을 건너뛰었다. 곡성 휴게소에서 11그릇의 유부우동 한 그릇씩 뚝딱하고 차에 올랐다. 우리를 안내하는 문화해설사는 전라남도 일원의 관광지 및 문화유산에 관한 해설로 버스에서의 지루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꼬불꼬불한 도로를 지나고 산 비탈길을 지나 낙안읍성 마을에 도착되었다. 이곳은 몇 차례 왔다간 곳으로 많이 익숙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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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고려후기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태조 6년에 토성을 쌓았는데 1424년부터는 돌로 쌓으면서 규모를 더 넓혀 동.서.남에 성문을 두었으며,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해자를 파고 치성을 두기도 하였다. 성내에는 임경업장군비각과 객사, 중요민속자료 민가 아홉동 있으며, 성내와 성밖에 초가집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밖 매표소로 사용하고 있는 최창우가옥을 들어갔었다. 안채는 부엌, 방, 헛간으로 되어있으며, 기억자로 꺾여서 다시 작은방을 두어 매표소와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 가옥은 옛 모습을 지닌 점포라는 점과 낙안성 지역에서 보기 드문 ㄱ자형 평면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대문을 나와 높은 담 밖에서 보는 초가집은 다른 초가집과 다른 것은 담이 3면으로 높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해자를 넘기 전에 주변 공원에는 다양한 모양을 한 목장승이 읍성을 지켜주고 있는 듯 큰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고, 해자를 넘기전에는 석구상 3기가 출입자를 검색이라도 하는 듯 지키고 있다. 해자를 건너 성문에 들어가 마을 돌담길을 걸어 보았다. 대나무를 얼기고 설켜 만든 문은 속이 훤히 보이고 한창 피고 있는 능소화는 한 폭의 농촌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골목길의 인척이 들리면 눈꼽창으로 내다보는 아낙네의 눈빛은 수줍은 듯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고 벌써 빨갛게 익은 고추는 멍석위에 햇볓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다시 뒤돌아 성상로에 올랐다. 동문은 넓은 추녀를 갓을 삼고 둥근 옹성을 방패삼아 몇 백년을 버티고 있다. 성내에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채반만한 하늘 밑에 숨어 있는 듯하였다. 모든 집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왜 그다지 통제하는 집이 그리도 많은지 대문 한번 잡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하는 성안의 집들을 보고는 인심이 그리도 각박하다는 것을 느끼며 뒤돌아서곤 하였다. 성상로에 오라 성밖의 넓은 들을 보면서 옛 사람들은 성밖에서 농사를 짓다가 날 리가 나면 성 안으로 달려와 몸을 피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남문도 동문과 같은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해양은 사정없이 온 몸을 불덩이로 만들어 가는 듯하였다. 얼른 한 바퀴를 돌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 전망대에 오르니 강릉 최선비님께서 달궈진 몸으로 반대편에서 열심히 성밟기를 하고 있었다. 서문에 내려서니 경상북도 대구에서 오신 선비들이 시원한 맥주 한잔씩 하고 있었다. 서로 통성명으로 인사하고 한잔씩 나누어 더위와 함께 마시니 갈증은 사라지고 몸은 날아갈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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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에 핀 원추리는 작은 바람에 흔들리고 골목길 맏닫는 곳의 초가집은 싸리대문이 활짝 열렸다. 이 집이 중요민속자료 제95호로 지정된 김대자가옥이었다. 이 집 안채는 서쪽부터 부엌, 안방, 마루, 작은방으로 배열되어 있다. 부엌과 안방의 사이에 흙으로 벽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중간쯤에 조왕신을 모시던 자리와 광솔불을 켜던 선반을 설치한 자리가 있다. 앞쪽벽의 윗부분에는 빛이 통할 수 있는 봉창들이 있어 부엌이 좀 밝다. 몇 해 전 만해도 이 집에는 평상시 농가와 다름이 없었는데 지금은 담과 함께 이곳에서 생산되는 전통 놀이기구와 생활용품을 팔고 있으며 또한 전통놀이 체험을 함께하는 집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두루두루 돌아보고 바로 뒷집 주두열가옥에 발을 들어놓으니 똥개는 반갑다고 꼬리치며 팔짝팔짝 뛰고 있는데 주인이란 사람은 ‘남의 집에 누가 들어오라고 했느냐’며 소리치며 달려드는 듯하였다. ‘이 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으면 들어올 필요도 없다’고 하자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 다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겐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하지 않느냐고, 이곳에 온 목적은 낙안읍성 전체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을 보는데 더 큰 의미를 둔다’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당에 말리고 있는 고추에 맞추어 사진 한 컷 촬영하고 돌아 나왔다. 다른 가옥은 반갑다고 둘러보라고 하는데 왜 이 집만큼은 그리도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지 차라리 문화재로 지정이나 하지 말 것이지 하는 생각으로 골목길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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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쪽으로 보니 비각이 보여 가보니 임경업군수비가 비각 내에 세워져 있었다. 임경업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인조 4년(1626)에 이곳 전라도 낙안지역에 군수로 부임하여 낙안읍성을 쌓았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큰 공을 세워 이 지역에서는 수호신으로 신봉하기도 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주민들이 큰 제사를 지내고 있다. 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자의 선을 그리는 팔작지붕을 얹었다. 앞면과 옆면의 기둥사이에는 붉은 막대들을 세워놓았고, 뒷면은 길다란 널판을 끼워 벽을 이루게 하였다. 비각 앞에는 ‘전군수임장군비각 영건표적비’가 자리하고 있고, 비각 앞면 윗부분에 ‘차임장군비각판상운(1893, 신병우)’과 ‘비각문관중건기(1952, 김상언)’이라 새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영조 24년(1748)에 비각을 세운 후 1893년과 1952년에 각각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군수임공경업선정비’라고 새겨진 비신을 세우고 구름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을 조각한 머릿돌을 올렸다. 이 비는 임경업장군이 군수의 부임기간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간 후 그해에 비를 세웠음을 이곳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비각 옆에는 주막이 있어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 많은 음식명을 기록한 광고판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발의 시원한 막걸리와 부추부침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했으나 약속된 시간은 다가오고 아직 보고픈 곳은 남아있어 포기하고 객사로 향했다. 솟을삼문이 객사를 보호하고 있었다. 우측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중앙에 전패(殿牌)라고 쓰인 팻말이 놓여 있었다.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초하루와 보름에 한양땅 임금에게 직접 예를 올리지 못하고 이곳 군수도 이곳에서 예를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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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객사는 세종 32년 군수 이인이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총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앞면 3칸짜리 건물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이 대칭으로 붙어 있는 구성을 이루고 있고, 지붕은 본 건물은 앞뒤로 간략하게 맞댄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는 반면, 부속 건물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앞면에 연봉오리와 연꽃 모양으로 장식해 놓았지만 부속 건물에는 모두 잘라 간소하게 꾸몄다. 현판은 “樂安之館”으로 붙어있다. 자연석 초석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동헌까지 보기위해 협문을 들어서니 형틀에 묶어 볼기를 맞은 죄인이 아픔을 호소하고 있고 수령 앞에 조아리고 앉은 죄인은 한창 문책을 받고 있었다. 동헌 옆에는 내아가 있어 이곳엔 가지런히 진열된 장독대와 부엌에서 한창 밥을 짓는 아낙네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모두 관람을 끝내고 낙민루 옆을 지나치면서 오늘의 낙안읍성 답사가 모두 끝났음을 말해주듯 느티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버스에 올랐다. 짧은 시간이지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라도 답사를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추후 다시 오는 날이면 좀 더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아래에서 위까지 하나하나의 구조물에 숨어 있는 장인의 정신을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고 순천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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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전통문화진흥원
글쓴이 : 정진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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