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2007.9.25.정진해]
아침의 시원한 바람이 동해바다에 파도와 함께 날아든다. 문풍지를 뚧고 들어오는 햇살이 일출을 알리고 방금 지나간 열차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지나가면서 수수의 머리만 흔들고 서울땅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해 뜨기도 전에 꼬끼옥 하고 노래하던 숫닭은 온데 간데 없이 보이지 않았다. 추석 명절이라 부엌에서 구수한 내음이 쪽문을 타고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들 오랜 세월동안 집을 지켜 온 우물가에 모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틈에 마당 앞 화단에는 연분홍빛 봉선화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낫을 들고, 카메라를 챙겨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넓고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의 한 켠에 자그마한 주차장이 봉수대 입구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아무런 팻말도 없으면서, 아무런 이정표도 없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통해 봉수대로 올라간다. 몇 일전에 비가 이곳 어달산에도 많이 내렸는지 길목은 움푹 패인곳도 있고 자갈이 굴러와 한곳에 모여있는 곳도 있으나 오르고 내려가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헉헉거리면서 산을 오르는데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두두둑 흘려 내린다.
[묵호항]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와 묵호항이 눈앞에 와 닿는다. 오랜 옛날 이곳에 소를 몰고 오르던 기억이 났다. 소년목동들이 나보다 큰 소를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풀을 먹게 하던 그 어린시절이 그립기만 하였다. 어린 소년목동 때 바위 아래서 기도하던 아저씨를 보았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주인이 와서 기도를 하였던지 그 표시를 작은 돌에 하얀 소지종이를 실로 묶어 두었다. 이 바위가 소년목동시절에 많이 보았던 범바위이다. 그 모양이 범같이 생겼다고 어른들이 알려 준 바위이다. 소를 이 산에 놓아두면 북쪽으로 남쪽으로 다니면서 풀을 뜯는 사이에 소년목동들이 범바위 밑에 두고 간 1환짜리, 5환짜리 돈을 주워서 밀, 옥수수 펑튀기 값으로 지불하곤 한 곳이다.
[범바위]
이곳에서 봉수대까지의 거리는 15m 정도의 높이다.
시원한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니 흘리던 땀방울도 멈추고 있다. 멀리 보이는 망상해수욕장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넓은 백사장만 십여리가 펼쳐 보이고, 발아래 있는 망상역 사이로 지나가는 열차는 강릉과 서울로 가는 듯 하였다. 넓은 마사평에는 벌써 벼를 거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직 황금빛으로 가는 색갈이 펼쳐져 있다. 저곳의 저집은 내 동무 장아무개 집이고 저곳 심곡에 저집은 김아무개 동무집인데, 아니 이곳은 문화마을 남구만선생 사당이 있는 곳이기도 하네, 하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망상해수욕장]
봉수대에 올라서서 사방을 보니 무성하게 자란 야생화와 함께 이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식물이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낫을 들고 베려고 하였으나 아직 이곳에 낫을 들고 베어야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발굴하여 복원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탓인지 주위에 식물들이 없는 곳이 많이 있다. 그래서 많은 식물들이 이곳에 씨를 내려 놓을 때까지 기다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낫을 거두었다. 노란꽃도 피었고 하얀꽃도 피었고 남색꽃도 피어 있었다. 주위에 놓고 간 음료수병을 모아두고 봉수대 중앙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에는 망망한 대해로 적이 바다로 쳐들어오면 곧 알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겠고, 남으로 보면 멀리 삼척방향에서 들어오는 적의 동태를 알 수 있는 곳이라는 것도 알겠고, 북으로는 가로막힌 금진의 오근산에서 피어오르는 봉수를 보고 적의 동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겠고, 서쪽으로는 준엄한 태백산맥의 봉우리 하나하나에 피어오르는 봉수로 적의 동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충분히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봉수대 곳곳에 파편으로 흩어진 그릇은 모두 소년목동들이 돌팔매질로 깨뜨린 것이며, 이곳의 수 없이 많은 돌은 소년목동들이 범바위 옆으로 굴러 내렸기에 봉수대 돌이 많이 없어진 것이다.
[동해어달산봉수대]
그 옛날 소년목동시절을 생각하면서 다시 그 길을 걸어 본다. 서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갔다. 봉수대를 발굴 복원하면서 차가 다니던 길은 넓은 신작로가 된 듯 하다. 그 길에는 아주 작은 꽃부터 시작하여 노랗고 빨갛고 파란색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를 반기는 듯 하였다. 어느쯤 갔을까 발 아래에는 넓은 자동차도로 위에 차들은 누구와 만나기로 약속이나 한 듯 쾌속으로 질 주하고 있었다.
[사문재]
북에서 남으로 넘어가는 사문재 위에는 남과 북의 경계인 듯 버티고 누워 있고, 멀리 초록봉은 동해시를 안고 있는 듯 하다. 산길을 따라 마사평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머물러 섰다. 이곳에 앉아 친구의 집을 찾아 보았다. 초구마을에 있는 저 집은 진익이 동무의 집이고 그 옆에는 익주동무 집이고, 개울 건너 저 집은 승렬이 동무 집이네, 심곡 마을이 옛날보다 많이 발전된 모습으로 보였다. 저곳은 문화마을로 지정된 심곡 마을이고 마을 중앙에는 남구만 선생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마사평;초구.심곡마을]
남구만 선생은 1689년 4월에 사면되어 풀려난 때부터 1690년 2~3월경까지 이곳 심곡마을에 1여년간 남짓 있었다. 남구만 선생은 심곡 약천마을에 머무는 동안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거진다....생략"를 지었던 곳이다. 지난해에도 이곳 심곡 약천마을에서 약천이라 이름지어진 우물도 보고, 사당도 둘러보고, 약천정(정자)도 둘러 보았다. 이곳에 앉아 보니 새로운 느낌이 온다. 넓은 마사평 들판 중앙에는 동해고속도로가 누워있고 동서로 갈라진 곳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고을고을 마다 몇 채씩 집들이 채반만한 하늘밑에 물이들어 누워있고, 주위의 산에는 아직 짙은 초록색을 변함없이 발산하고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디선가 기적소리가 뿌웅하고 들여왔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봉수대로 향했다.
[청미래덩굴 열매]
청미래덩굴이 빠알간 색을 내면서 익고 있고, 그 사이로 길게 들어진 거미줄이 나의 얼굴에 도배를 해 버렸다. 거미란놈은 보이지 않고 거미줄 그물만 길고 넓게 쳐놓았다. 아래만 보고 걷다가 그만 거미줄이 나의 얼굴을 사로 잡아 버리고 말았는데, 거미란 놈은 어디 숨어서 나의 얼굴을 보고 많이 웃음을 짓고 있을거라 생각하니 내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던 것이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태백산맥]
다시 봉수대에 오니 봉수대를 보기 위해 6명의 남자가 땀을 흘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곳 봉수대를 보려고 오셨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봉수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그들에게 해설해주니 내 가슴이 더 확 트인듯 하였다. 이 어달산봉수대는 서울이란 그 멀리에서 이곳까지 내가 1문화재1지킴이 활동을 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하산하여 다음 행선지인 묵호동대와 까막바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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