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진해(시인.수필가)
문화재 : (명승) 대관령 옛길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삼포암길 133, 등 (어흘리)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는 긴장의 연속이 끊이지 않는 길, 사계절 아름다운 풍치가 시작되고 끝나는 길이다. 1911년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이천과 강원도 강릉을 연결하기 위한 도로를 개설하면서 어려운 구간 대관령 도로가 1913년 9월에 착공하여 1917년 8월에 완공된 신작로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 이 길은 영동고속도로인데, 2001년 영동고속도로 전 구간이 왕복 4차로 확장되면서, 기존의 대관령 구간인 성산면 서쪽 구간 중 영동고속도로와 중복되었던 구간은 456번 지방도로로 격화되었고, 동쪽 구간은 35번 국도에 포함되었다.
대관령은 삼국시대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있어 사서(史書)에 지명이 기록될 정도였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해 주었던 교역의 현장이고, 말과 소를 끌고 넘나들어야 했던 교통로, 해산물은 영동에서, 농산물은 영서에서 거래하기 위해 넘나들었던 상업로, 강릉의 관문 역할과 진산으로 불러왔었다. 이 길은 수많은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고 강릉단오제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백두대간의 큰 고개로 자리매김한 길이다.
대관령 옛길의 시작은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국사성황신과 대관령 산신을 모신 사당에서 시작된다. 약 1.6km에 이르면 옛길의 반을 뜻하는 ‘반정’이라는 곳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大關嶺 옛길’이라는 표지석을 만난다. 대관령을 아흔아홉 굽이는 강릉 외가에 살던 율곡 이이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먹기 위해 곶감 100개를 봇짐에 챙겼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곶감 한 개씩 먹었는데 정상에 이르자 남은 곶감은 1개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대관령굽이는 모두 99굽이길이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중종 때 ‘고령산’이라는 사람이 좁은 길을 좀 더 편하고 많은 사람이 오갈 수 있도록 널찍하게 길을 닦았으나 워낙 험한 길이다 보니 어슷한 곳에서 산적이 출몰해 혼자 다닐 수 없어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길을 갔다고 하여 ‘하제민원’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대관령은 큰 관문이라는 뜻이다. 대관령을 사이에 두고 동쪽을 ‘영동’이라 부르고 서쪽을 ‘영서’라고 부르면서, 강원도를 일컫는 ‘관동’이라는 지명도 대관령에서 유래되었다.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아홉 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대령(大嶺) 또는 대관산(大關山)이라고도 불리고 옛날 관방(關防)을 두고 목책을 설치했기 때문에 ‘대관령’이라고 불린 이 고개를 처음 개척한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강원관찰사로 부임했던 고형산이다. 그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의 힘으로 몇 달 동안에 걸쳐 이 고개를 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관령 옛길은 처음부터 뭔가 어색한 느낌이 오지만 숲으로 들어가면서 옛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된다. 심한 경사를 피해 한 굽이 지나면 저 앞에서 다시 사라졌다가 다음 길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이 나타나고,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등 많은 궁금증을 더해가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잠시 돌탑에 작은 돌 하나를 얹어 놓을 수 있는 여유를 갖기도 한다.
이 길은 옛사람들이 영동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과 영서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을 나르던 “선질꾼”과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매달고 한양 과거 길에 오르내리던 선비들의 고갯길이다. 휘어진 길이 아니라면 오르내리기조차 힘겨워 굴러 내려갈 듯한 험한 길, 일찍 이 고개를 대굴 대굴 구르는 고개라고 하여 ‘대굴령’으로 부르던 것이 ‘대관령’이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와 ‘원님이 울던 고개’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처음 부임한 원님이 동해의 푸른 바다가 보이자 세상 끝에 당도했다고 눈물을 흘리고, 임기를 마치고 떠나갈 때는 그동안 정들었던 생각을 하며 울면서 간다고 하여 붙어진 고갯길이라는 정감이 넘친 길이다.
자그만 비 ‘記官 李秉華遺惠不忘碑’ 이 비에는 ‘百緡殖利 惠此店幕 賴而資生 不耕有食 行旅得食 居者有廬 銘之片石 以永來譽 道光四年甲申九月日’이라 새겼다. 이 비는 기관 ’이병화‘라는 향리(지방하급 관리)가 당시 대관령은 험준하고 민가가 없어 동절기에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아 이를 근심하던 중 반정에 주막을 짓고 어려운 나그네에게 침식을 제공한 참된 봉사자로, 이를 오랫동안 알리기 위해 조선 순조 24년(1824) 대관령 인근에 살던 어흘리 주민과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름드리로 자라고 있는 참나무와 서어나무, 물푸레나무, 금강송과 족도리풀, 맑은대쑥, 둥근잎제비꽃, 억새 등의 야생초도 자라고 있다. 주막을 향하는 길에는 하늘을 찌르는 한민족의 기상인 금강송이 무리 지어 자라고 있다. 예부터 소나무를 나무 중의 으뜸으로 생각한 것은 아이가 태어나면 문에 걸던 금줄에 솔가지를 함께 꽂고, 결혼식 초례상에 백년해로를 기약하며 기러기와 솔가지를 놓아두고,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힐 때에도 소나무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집의 중심이 되는 대들보로 사용되어졌기에 소나무를 심은 성주는 집을 지키는 신이 되었으며, 상량신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소나무는 우리의 정서에 가장 알맞은 친근한 나무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주막은 대관령을 넘어온 사람도 넘어갈 사람도 허기를 달래던 곳이다. 한 사발의 막걸리에 김치나 감자전으로 해결하였을 것 같다. 수려한 자연경관은 눈 녹아 흐른 물은 계곡을 넘치고, 큰 바위 작은 바위를 어루만지며 옛사람들의 발자취도 남아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발을 담그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대관령의 옛 길은 오늘도 서정에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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