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에서 서로의 학문을 토론하며 지냈던 지난날을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겨둔 채 교문을 나섰던 동기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여행을 떠나자는 약속은 벌써 2개월이란 기간이 흘러 오늘 만남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농촌 관광을 전공한 사람들이라서 관광하면 먹던 밥도 멈추고 관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제주도에서 2박 3일간 다양한 종류의 관광을 체험하던 그때의 기억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시간이 된 것 같다.
화정역으로 달려갔다. 한 사람씩 버스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 먼 발치에서 보였다. 모두 12명이 차에 오르면서 반가운 인사는 멀리 떠나있던 지인을 만난 것과 같이 반갑고 할 이야기가 많았다. 출발은 강화도를 향해 달리고 있다. 창밖의 봄은 한창 익고 있다. 나뭇가지에 잎은 다 나오고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는 내일 아침에 약속한 것도 있고 이틀 후에 피겠다는 약속도 있는 듯 잎과 함께 시간을 기다린다. 머물러 있는 듯한 한강에는 구름 몇 점이 비춰주는 것밖에 없다. 옛 검암포에는 그 흔적만 남긴 채 뱃사공의 구성진 노랫가락은 물결 따라 떠나갔는지 조용히 바람의 물결만 밀려가고 있다.
강변도로를 따라 전류 포구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포구에 묶인 배는 뱃사공을 기다리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옛 서패리 사람들이 오가던 나룻배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도 포구에서 바라본 심학산 저편 손짓으로 부르고 있는 듯하다. 하성, 월곶도, 통진향교 앞을 지나 강화대교에 들어서니 문수산이 높게 보인다. 강화 인삼센터 옆 염하해변도로를 따라 연미정 방향으로 향했다. 염하 넘어 높은 문수산에는 옛 승군이 축성해 놓은 성벽이 정상을 찍고 다시 북쪽의 능선을 따라 문수골 끝자락 북문에서 멈추어 섰다. 철책선이 강화 해안을 따라 둘려 있고, 철책 넘어 유도에는 1996년 7월 대홍수 떠내려온 황소 한 마리의 이야기를 담은 채 녹색의 섬으로 자리를 지킨다.
월곶돈대가 첫 여행지이다. 옛 농촌 마을에 장무공 황형장군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연미정이라 불렀다. 이곳의 지형이 제비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연미정 주위는 월곶돈대로 채웠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연미정과 나이가 같다. 처음 황형장군이 이곳에 정자를 지으면서 기념으로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 오랜 역사의 이정표였던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최근 강한 폭우와 함께 불었던 링링에 의해 그만 동쪽의 느티나무가 상채를 잃고 말았다. 지금은 부러진 아랫부분에서 새로운 새싹이 올라와 옛 느티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돈대를 둘러보며 연미정에서 바다건너 북녘땅을 바라보며 여행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서로 사진을 촬영해 주는 미덕도 있었다.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보며 손으로 만져 본 돈대의 여장은 총탄의 흔적은 없지만, 옛 병사들의 정신을 만져주는 느낌이 손에 와 닿았다. 홍예문을 나서며 여행의 첫 스케치를 그려 가슴에 담았다.
화문석문화관으로 가는 길은 평화 전망대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우측으로 철책선을 끼고 달린다. 바다 건너의 북녘땅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다. 가지 못하는 땅, 오지 못하는 땅 서로 바라만 보는 것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섭섭함이 가슴에 와 닿는 시간이다. 옛 고려 고종이 강화도를 천도했을 때 처럼 배를 타고 출발하면 짧은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배 한 척도 없는 텅 빈 바다이다. 아무 쓸모가 없는 바다를 그대로 묶어 놓아야 하는지 우리의 마음도 씁쓸하다. 고려 천도 공원은 옛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할 때 임금과 많은 백성이 이곳으로 건너온 곳에 역사의 흔적을 표시해 두었다. 강화도는 어디를 가도 역사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화문석 마을 앞을 지났다. 봄이 익어 있는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에는 화문석문화관의 방향을 가리킨다. 언덕 위에 자리한 문화관은 앞의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높은 곳에 있다. 화문석 돗자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 씨줄과 날줄의 만남이 수천 번을 오가며 한 장의 돗자리가 완성된다. 들판을 보고 있는 화문석 돗자리를 엮는 공인은 들판을 넘는 석양까지 놓치지 않고 화문석에 담는다. 큰마음, 아름다운 감성까지 모두 담아 한 폭의 그림까지 담아내는 게 화문석 공인의 정신이다.
문을 밀어 열었다. 안쪽에는 친절한 안내원이 매표도 하고 방향을 알려준다. 전시실에는 장인 정신이 담긴 다양한 화문석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으르렁거릴 호랑이와 들판을 나는 기러기, 마당 앞에 화들짝 피어 있는 봄꽃, 매화나무에 앉은 까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내놓는 방석 등 매우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꽃무늬를 만들고 있는 여성분들이 모여서 한창 씨줄과 날줄을 엮고 있다. 조용한 마을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모두 이곳에 모여 삶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눈은 씨줄과 날줄을 보고 손가락은 일정하게 실처럼 가는 왕골의 재료를 채워나간다. 금방 날아갈 듯 날개를 펴고 있는 오색의 나비가 날갯짓한다.
고려시대부터 가내수공업을 하던 화문석이 지금도 화문석 마을에서 이어지고 있다. 100여 년 전에는 왕실에서 화문석 도안을 특수하게 하라는 어명을 받기도 하였다. 옛적에는 무늬가 없는 화문석이라면 지금은 행복과 건강을 상징하는 다양한 문양이 화문석에 담아낸다.
좁은 마을 길은 자동차를 천천히 움직이게 한다. 민통선 검문소를 지나서 평화의 전망대로 향했다. 지척에 있는 북녘땅이 바로 앞에 누워 있다. 오가는 서해의 물결은 사구를 드러냈고 바다 넘어에는 들과 함께 여기저기 몇 채의 집이 운집해 있다. 우리 곁에서 흔한 자동차와 사람의 움직임도 없는 땅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우리 땅과 함께 식물을 꽃 피우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야 하는 들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땅, 그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저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바다 건너 우뚝 솟아 있는 전망대의 모습만 보아도 동경의 꿈은 떠나지 않을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모처럼 민통선 내에서 교동도로 향해본다. 꼭꼭 숨어 있는 듯한 강화도의 민통선 마을은 한창 농번기가 시작되어 들은 한가할 시간이 없어 보인다. 들에 나가 허리를 굽히고 잡초를 뽑고 작물을 심는 나이 드신 농부, 트랙터로 밭을 갈고 멀칭을 하는 젊은 농부의 하루가 짧아 보인다.
교동도 연륙교를 넘었다. 처음 와보는 일행도 있었다. 조용한 섬, 북녘과 가까이에 있는 섬, 부농의 섬, 풍경의 섬, 역사 문화를 간직한 섬이다. 대룡시장은 60년대가 머물러 있는 시장이다.
작은 구멍가게에 교동도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과 현대 문명과 함께 가고 있는 다양한 물건, 어느 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떡, 그리고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들이 조금조금 진열된 상품은 손님의 눈길과 손길을 기다린다. 특히 강아지떡이 있다. 강아지가 먹어야 하는 떡이지만,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백평야의 이북 주민들은 굶주린 어린 자식한테 떡이라도 몰래 만들어 먹이려고 인절미를 강아지를 먹이기 위해 만든다고 속이며 자식들한테 먹인 떡이라고 하여 오늘날 대룡시장의 별미가 된 것 같다. 부지런히 만드는 주인은 강이지떡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떡을 만들고, 관광객은 그 떡을 구입해 맛을 본다.
(교동도에서 생산된 상품)
마을 할머니는 갓 채취한 나물을 자그마한 플라스틱 함지에 수북하게 쌓아두고 아래에는 나물의 이름까지 큰 글씨로 적어두었다. 매번 묻는 사람마다 대답해 주기가 귀찮아서 그런 것 같다. 취나물을 ‘최나물’이라 하였다. “할머니 이 나물이 취나물이 아닌가요?”라고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최나물‘이라 하였다. 갯벌에서 자라는 나문제도 한 그릇에 담겼다. 쌍화차로 승부를 거는 옛날 다방 쌍화차 집도 있다. 몇 차례 이곳 들려 쌍화차를 마셔 보았던 곳이다. 벽과 천정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이름이 종이에 기록되어 붙어 있다. 교동 호떡집, 떡집, 대성양복점, 순무김치집, 봄소리에 하루 카페도 있다. 대룡시장은 외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시장이다. 짧은 시장길에 서로 마주 보며 물건을 팔며 이웃의 상품도 소개를 해주는 시장 사람들이 정겨워 보인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화개산이다. 산으로 오르다 보면 다양한 볼거리를 만난다. 옛 조선 후기 때 만든 한증막이 있고, 연산군 유배지, 산성, 봉수대 등이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연산군 유배지에는 옛 조그마한 밭이 모두 변해 정원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고, 화개산에는 스카이워크가 만들어져 그곳으로 오르는 모노레일까지 갖추어져 있다. 오르는데 20분, 내려오는 데 20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모노레일에 9명이 승차하고 출발하였다. 가파르게 오르고 가파르게 내려가는데 불안의 연속이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로운 시간이 아니다. 내려갈 때면 오른쪽 발이 마치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는 것과 같은 느낌이고, 가파르게 오를 때는 앞의 손잡이를 꼭 잡는 웃지 못할 행동이 연속이다. 정상에서 멀리 북녘 땅으로 볼 수 있고 동쪽의 강화도 서쪽과 남쪽의 여러 섬이 조망된다.
화개산에 오르니 교동의 넓은 농토에 감탄한다. 사계절 화개산에 오르면 교동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을 가졌기에 종종 화개산을 찾는다.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보는 교동도의 풍경은 섬의 중심에 와 있는 것 같다. 눈 아래 넓은 평야는 여러 개의 섬을 연결하여 만들어진 인공들이다. 갯벌이 농토가 되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쌀은 인천시민 전체가 일 년 동안 먹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교동도는 북녘의 연백과 마주 보는 해안에 제방을 쌓아 고구 저수지를 만들고 경제 확장하면서 교동도는 조금씩 경작지를 늘려 왔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까지 계속되어 지금의 넓은 농토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농업관광을 위한 초점을 맞추어 스카이워크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동도는 역사적으로나 자연적, 그리고 인공적으로 접근된 천혜의 관광지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1173년에 축성된 화개산성, 1629년에 축성한 교동읍성,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과 철종잠저소, 봉수대, 단묘, 교동향교, 화개사 등이 오늘날 교동도가 역사의 섬임을 증명한다. 특히 화개산정원에는 역사에 남지 말아야 할 연산군의 유배를 와서 생활했던 그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과 어울리지 않은 초가 한 채를 정원의 가운데에 재현해 두었다. 교동도에는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넓은 농토에 농사를 짓고 있다.
고려 중엽부터 조선말까지 유배지로 이동된 곳,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섬은 교동 다리가 놓이면서 외부에서 찾아드는 관광객의 발길이 빈번한 섬이 되었다. 교동의 난정리마을에는 매년 10만 송이 해바라기가 활짝 피는 날에 축제가 열린다.
우리의 짧은 여행은 화개산 스카이워크에서 본 교동도의 넓은 농토와 주변의 크고 작은 섬, 그리고 바다 건너 연백 땅의 풍경으로 또 하나의 농촌 관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를 엮을 수 있는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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