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을 찾으면 가은역으로 가라! 옛 번성했던 석탄수송의 출발역이었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그 자리를 지키는 가은역만 남아 있다. 가은역에서 양산천을 따라 상괴리에 이르면 희양산을 향해 양산천이 이어진다. 쉽게 출입할 수 없는 봉암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맞배지붕에 화려한 단청을 한 건물 앞에 굵은 쇠사슬이 출입을 막는다. “봉암사는 특별 수도원으로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에 발을 돌려야 한다. 봉암사는 문화재 보고이다. 매년 부처님 탄생일인 4월 초파일에만 갈 수 있는 곳, 출입통제가 철저한 곳이다.
봉암사는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신라 헌강왕 5년(881)에 지중국사 도런(824~882)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신라 문호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선종 산문인 구선산문의 일맥인 희양산문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으로 발을 딛는다는 것은 특별히 주어진 시간인 것 같다. 계곡의 폭에 비교해 매우 협소해 보이는 일주문은 예로부터 걷는 길이었고, 차도는 별도로 두었다. 하천을 따라 나 있는 봉암사 가는 길은 황금비율로 균형을 잡은 야생화와 나무들의 호위로 이어진다.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4주가 아닌 2주로 지탱하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독특한 형식의 건물이다.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신성한 가람으로 발을 딛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특히 스님의 수도원으로, 부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주문은 1900년대 사진에서 그 연대를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적어도 18세기 초까지 소급될 수 있는 현재의 봉암사 전각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591호로 지정된 일주문은 가분수라고 하면 맞는 말이다. 지면에 닿아 있는 폭과 위의 지붕의 폭에 비교하면 지붕의 폭이 넓다. 두 개의 기둥이 직선상에 놓이고 앞뒤로 기둥을 보호하는 활주를 대고 기둥과 활주 사이에는 보조목을 두었다. 보조목에서 다시 두 개의 받침목이 공포를 받치도록 하였다. 두 개의 기둥만 두면 불안한 느낌이 들지만, 앞뒤로 보조목을 받치게 하여 안정된 느낌을 주도록 하였다. 활주와 기둥 사이에는 두 장의 판목을 벽처럼 고정하고 안쪽으로 안상을 새겼다. 겹처마를 한 건물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풍판을 달아 비바람을 막도록 하였다. 창방에 건 현판에는 ‘曦陽山鳳巖寺‘라고 하였다. 기둥을 제외한 기둥의 주의를 비롯한 공포와 서까래 등에는 금단청을,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으로 단청하고 주변으로 구름무늬로 단청하여 더욱 위엄스럽고 화려하다. 건물 안쪽의 창방에는 ’鳳凰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또 하나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은 큰 바위가 좌우로 일주문의 폭 만큼 길이 봉암사로 향하는 자연의 문이다. 약 1km의 거리에 이르러서야 봉암사 남훈루에 도착된다. 솟을대문 형태의 2층 누각은 좌우로 4칸의 방을 두고 안쪽으로 3칸의 중앙칸은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통로를 두었고 좌우에 방을 들었다. 종무원에 들러 담당 스님의 안내로 봉암사에 대한 간략한 연대와 문화재 위치를 소개받고 둘러볼 수 있었다.
봉암사는 지증국사에 의해 창건되고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대에 험허당 기화 스님이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고 선조 때 임진왜란(1592~1598년)으로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것을 1674년과 1703년에 중건하였으나 크게 쇠퇴기를 맞았다. 1907년 의병 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을 시작으로 계속 전각을 늘려나가 1927년에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고, 1955년에 금색전을 시작으로 다시 복원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지증대사탑, 지증대사탑비, 정진대사탑, 정진대사탑비, 삼층석탑, 환적당지경탑, 함허당득통탑, 석종형부도 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특히 극락전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진 건축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보물 제1574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지증국사가 초창하여 80여 년 후 화재로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극락전만 남았다.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도 다른 전각은 소실되었으나 극락전과 일주문만 남아 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 피난 시 원당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하며, 건물 내에는 ‘어필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일본 강점기에 사용되었던 망와에 소화16년(1941)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건물을 보면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현존하는 목탑(木塔) 중의 하나이다. 정면이나 측면에서 보면 모두 같은 구조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위아래에 덮개돌 모양을 구성하고 그 사이에 약간 들어간 면석을 채운 기단이다. 기단 위에는 외진주 12개와 내진주 4개를 세워 서로 조합하였다. 기단 위에는 건물 바깥쪽을 두른 기둥인 외진주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형식으로 놓여 1층을 이루고, 건물 안쪽에는 외진주보다 높은 기둥인 사천주를 받쳐 정면 1칸, 측면 1칸 네모난 몸체를 만들었다.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정(井)’자형의 우물마루를 깐 뒤 정교하게 장엄한 불단을 설치하였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판벽과 창호로 마감하였다. 정면에는 궁창을 단 4분합 띠살창문을 달았고 좌우에는 궁창을 달지 않은 띠살창문을 1개씩 달아 실내를 밝게 하였다. 공포는 내외2출목의 다포로 구성되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은 주간포는 4면의 면마다 2기씩 배치하였다. 심포는 모두 귓기둥의 귀포로 처리되었고, 살미첨차는 바깥쪽은 짧고 치켜 올라간 모습이 힘이 넘치는 앙서형이다. 안쪽의 끝부분이 둥근 모양의 교두형이다.
지붕은 각 서까래 홑처마로 이루어진 1층 지붕 위에 처마의 곡선이 마치 치마처럼 겹처마의 2층 지붕을 사모지붕을 만들었다. 사모가 모여진 꼭대기에는 절병통이 아닌 상륜부를 두어 석탑의 형식을 갖추었다. 내부의 천정은 사방으로 우물천장으로 맞추고 안쪽에는 닫집형태의 공간 중앙에 안상의 공간을 두고 천상의 꽃밭에서 회유하는 두 마리의 용을 표현하였다. 전체의 기둥 주의와 공포 서까래, 천정에는 금모로단청을 하여 화려하고 무게감 있는 건축물로 표현하였다. 독특한 외관과 건축수법 및 단청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봉암사의 삼층석탑은 남훈루와 석탑, 대웅전으로 이어지지 않고 요사채 뒤 금색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금색전은 대웅전이 있기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정면에는 금색전의 현판을 걸었지만, 후면에는 대웅전의 현판을 걸었다. 금색전은 봉암사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라 일컫는데, 실내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
삼층석탑은 앞에서 보면, 뒤로는 금색전(옛 대웅전)과 희양산이 직선상에 놓여 있다. 최고의 명당자리에 자리한 금색전 앞의 삼층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탑신부를 두고 상륜부를 완전히 갖춘 석탑이다. 석탑 주위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돌난간을 두르고 그 중심에 선 석탑 앞에 배례석을 두었고 같은 높이의 지대석을 깔았다. 단층 받침돌은 일반적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전형적인 신라석탑이 하대에 이르러 변화하였던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석탑 앞의 배례석 옆면과 앞면에는 각각 2구와 1구의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바닥 돌 아랫부분에는 곡선을 그리는 1단의 받침이 있어 어떤 석조물의 덮개돌이 아닌가 생각된다. 석탑을 받치고 있는 바닥 돌의 윗부분에는 약간 올라온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4장의 면석으로 조합된 기단을 구성하였다. 각 면석의 모서리에는 탱주를 새겼고, 면석 중앙에는 우주를 새겼다. 기단석 위의 갑석 밑면에는 부연을 얇게 새겼고 윗면에는 둥글고 각진 굄 장식을 두어 위의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인 탱주를 새겼다. 지붕돌의 추녀 아래는 직선이지만 낙수면의 전각에 이르러서는 반전이 있어 경쾌하게 보인다.
지붕돌을 받치는 받침은 1~2층은 5단으로 구성하고, 3층은 4단으로 이루어졌다. 1층의 몸돌에 비교해 2층과 3층의 몸돌은 1/2 정도의 높이로 줄어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철간이 꽂혀있어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상륜부의 아래 노반은 두 개의 돌을 포개놓은 듯하고 그 위의 반원형인 복발은 겉면에 2개의 줄이 둘리고 네 장의 돋을새김 꽃잎이 새겨있다. 복발 위에 놓인 앙화(仰花)는 네모난 각 면과 네 모서리에 6장 또는 4장의 연꽃잎을 배치하고 그 위에 5겹의 보륜(寶輪)을 꽂은 모습이다. 다시 그 위에는 단면 8각의 보개(寶蓋)를 놓고서 불꽃 모양으로 만든 ‘십(十)’자형의 수연(水煙)과 함께 용차(龍車), 보주(寶珠)를 올렸다. 이 가운데 보개의 모습은 고려 시대에 건립된 부도의 지붕돌과 비슷한 것이어서, 아랫면에는 1단의 받침을 두었고, 8개의 귀마다 연꽃을 조각한 귀꽃을 표현하였다. 완전한 모습을 갖춘 이 석탑의 상륜부는 현재 전하는 석탑 가운데 매우 드물고 귀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