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해설관/ 전통음식자료

술 3병과 석 잔에 담긴 저녁 때 이야기

국보와 보물 2023. 4. 3. 22:26

수필가 정진해

 

문인회 카톡방에 8첩 상이 차려지고, 마시면 오래오래 재미있으라고 막걸리 빈 병 3개가 놓인 사진이 올라와 있다. () 시인께서 누구랑 드시냐?”고 질문을 던졌는데 정() 시인께서 , 사위랑 한잔합니다라고 답변을 해 주셨다. 안주가 족발이니 술맛이 얼마나 좋았을까? 카톡방을 보고 있는 저 또한 막걸리로 소주잔에 딱 3잔이면 세상이 모두 나의 것으로 보인다. 한 잔도 아니고 두 잔도 아닌 딱 석 잔이다. 그래서 지인들로부터 늘 최고의 술맛을 아는 술꾼이란 이야기를 듣곤 한다.

옛날 어른의 밥상에는 으레 반주가 놓였다. 나도 할아버지가 계실 때 늘 옆에서 보아왔었다. 반주가 작게는 한 잔이지만, 조금 과하다 하면 석 잔이다. 반주문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닌 일본과 중국에도 있다. 중국의 반주는 하반주, 좌반주라 부르고, 일본은 우리와 같이 반주(飯酒)라고 한다.

원래 막걸리는 쌀로 밑술을 담가 거기서 청주를 걸러내고 남은 술지게미를 다시 체로 걸러낸 술로 청주에서 파생된 술이다. 막 걸러냈다고 해서 막걸리라는 이름을 가진 막걸리는 밀가루로 만들기 시작할 때는 고작 60년 정도로 본다. 한국 전쟁으로 미국에서 밀가루를 원조해 주면서부터이다. 1960년 후로 쌀로 만든 막걸리가 금지되면서 어쩔 수 없이 밀가루를 이용하여 술을 빚게 되었다. 이때는 마을을 다니며 술을 빚는 집을 찾아내는 감시관도 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막걸리 받아 오라고 주전자를 들려주면 막걸리를 담은 주전자가 무겁다고 홀짝홀짝 마시며 집으로 와서는 아버지보다 먼저 술에 취해있던 어린 시절 누구나 추억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전통주라고 하면 그 종류가 지방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달랐다. 술맛은 집 안주인의 내공에 달렸다.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 적절한 발효 도수를 유지하기 위해 술독에 귀를 대고 술 익는 소리로 술맛을 체크했었다. 술은 아무 때나 빚지 않았다. 초복 후에 길일인 신미, 을미, 경자 일을 골라 누룩을 빚고 추석에 햅쌀로 신도주를 빚고, 음력 99일 중구에 대비해 국향주를 빚어 가을과 겨울 동안 반주로 마셨다. 정월 설날을 대비하여 소곡주를 빚고, 봄철에는 삼해주를 빚어 봄에서 여름까지 대비하고, 복중을 대비해 소주에 용안육, 대추, 인삼 등을 넣어 빚은 약소주를 준비한다. 또한 계절마다 특별 주를 빚기도 하는데, 화향주, 송화주, 죽엽주, 송순주 등이 있는데 이것은 제사와 차례 손님 대접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주용이기도 하였다.

또한 술을 빚는 길일이 있어서 그날에 가양주를 빚었다고 한다. 즉 정묘, 경오, 계미, 갑오, 을미일 이다. 이렇게 담근 가양주는 식사 때마다 바깥주인은 반주로 마시면서 주로 유기로 만든 밥주발 뚜껑을 잔으로 이용하였다. 주발 뚜껑은 갓 지어온 밥의 열기가 있어 약주를 따르면 몇 분 지난 후 술이 데워져 술맛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밥주발에 술을 채우면 엄지손가락이 닿지 않을 정도가 되므로 이 정도면 약주 한 잔이 되며, 이것으로 석 잔이 기본이었다. 만약 3잔을 넘기면 그 상은 밥상이 아니고 주안상이 된다. 왜 반주가 석 잔이어야 하는 이유에서 첫 잔은 식도를 열어 음식물의 목 넘김을 원활하게 해주고, 두 번째 잔은 술의 산미로 구미를 돋아주며, 셋째 잔은 소화를 촉진 시킨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성종 때 조선 3대 주호인 명상 손순효(孫舜孝14271497)의 반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종이 손주호를 불러 술 석 잔을 넘게 마시지 말라라는 계주령을 내렸다. 어느 날 성종은 손순효를 불러 중국에 보내는 국서를 지으라 했는데 그는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성종은 노기를 띠며 내가 딱 석 잔만 마시라 했거늘 이를 어기고 어찌 이리 대취했는가? 그렇게 흐린 정신으로 마중한 국서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 경은 물러가고 다른 신하를 불러오너라고 불호령이 내려졌다. 손순효는 황공해서 부복한 채로 오늘 신의 출가한 딸이 들러서 뭇사람의 권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는 대로 마셨지만, 글을 짓는 데는 과히 지장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부르실 것 없이 신에게 하명하소서라고 아뢰었다. 성종은 취중에 과연 어떻게 하나 보려고 붓과 벼루를 내주며 국서를 지으라 하였다. 손순효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문장을 지어올렸다. 이를 받아 든 성종은 한 자, 한 구가 틀리지 않은 명문장이었다. 성종은 다소 괘씸했지만, 그 취기에도 놀랄 만한 정신력을 지녔음을 보고 크게 칭찬하며 자네는 취한 정신이 한층 맑구나하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해롭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루에 이 잔으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면서 은잔 한 개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손순효는 은잔을 들고 보니 이 은잔으로 석 잔 마시기에는 너무 부족하였다. 궁리 끝에 안장을 시켜 주발만 한 큰 잔으로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매일 이 잔으로 석 잔을 마셨다.

며칠이 지난 후 성종은 입시한 손순효의 얼굴을 보니 예전과 다름없이 얼굴이 붉고 취해있는 모습이었다. 성종은 그 자리에서 손순호에게 화를 냈다. “내가 술을 경계하라고 일부러 작은 술잔을 주었거늘 어찌 이렇듯 많이 취했는고. 석 잔만 마시지 않고 여러 잔을 마셨구나호통을 쳤다. 손순효는 주저하지 않고 신이 어찌 어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딱 석 잔만 마셨을 뿐입니다.”고 아뢰었다. 작은 은잔 3잔만 마시면 이만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손순효에게 은잔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 앞에 대령한 은잔은 주발만 한 것이었다.

성종은 크게 의아하여 자초지종을 물으니 손순효는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상감마마께옵서 주신 술잔이 너무 작기에 은장(銀匠)을 시켜 잔을 늘리기만 했을 뿐 은의 무게는 조금도 보태지 않았사옵니다했다. 성종은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걷잡을 수 없어 크게 웃고는 앞으로 내 속이 협착한 데가 있으면 그처럼 두드려 넓게 해다오라며 다시는 술과 관련한 일로 손순효를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늘 안주가 부족한 손순효의 집에 가끔 음식을 내려 보냈다고 한다. 손순효는 주발만 한 은잔으로 석 잔만을 매일 마셨으니 삼배주계(三盃酒戒)를 지키고 자기의 주량도 채웠다고 한다. 그의 묘소 둘레석에는 후손들이 술병과 술잔을 양각으로 새겼다. 애주가이면서 청백리였던 조상님에 대한 애틋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한 후손들의 감각과 기지가 웃음을 자아낸다.

문인회에 올려있는 사진 한 장에서 피어나는 우리의 술 문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자리였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삼세번을 이야기했었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흔히 삼세번을 해서 판가름이 났다. 기념일에 만세를 부를 때도 만세삼창이라 하여 3번의 만세를 외쳤다. 우리 생활 속의 3번은 어색하지 않은 문화가 되었다.

막걸리 한 병을 술잔에 따르면 석 잔이 된다. 3명이 각자 석 잔씩 마시고 족발을 안주로 하여 즐거운 가족의 장이 마련되었으니 이보다 덜한 행복한 저녁 술자리가 감히 찾을 수 있을까 생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