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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소리 들리는 곳 ‘문경 봉암사’ 3
문화재 : 문경 봉암사 마애보살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21호)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보물 제171호)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보물 제172호)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탑비에서 선원 앞을 지나 양산천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너럭바위를 만난다. 이곳에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으며, 바위에 머리 부분을 돋을새김하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새긴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주변은 숲이 우거져 있고 앞에는 너럭바위를 씻어 내리는 양산천의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조용하고 청명한 느낌이 와닿는 계곡의 조용한 터는 오랫동안 머물며 시름을 달랠 만큼 정적이 흐르는 곳이다.
사람들의 출입이 되지 않는 곳이어서 찾는 사람도 없지만, 봉암사에서 수행하는 스님의 정신수양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백운대라고도 부르는 옥석 대의 북쪽 바위 면을 얕게 정을 쪼아 파내면서 불상이 들어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돌출시키고 가지런히 흘러내린 통 견과 법의는 선으로 처리하였다. 불상은 예배의 대상이기에 너무 근엄한 표정을 해서 안 되며, 다만 자비롭고 약간 미소 띤 얼굴이 호감이 가고 감정이 통한다.
마애불의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 매듭이 뚜렷하고, 옷 주름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뜨려졌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러 올려 연꽃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결가부좌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을 준다. 머리는 소발이고 나지막한 육계에 계주가 뚜렷하다. 얼굴의 크기에 비교해 큰 귀, 갸름한 얼굴에 우뚝한 코, 가느다란 눈, 꾹 다문 입 등이 조화롭게 잘 배치되었으며 양 눈썹 사이에는 백호 공이 확실하게 나 있다. 목에는 삼 도가 뚜렷하다. 두 손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한줄기의 연꽃 가지를 잡고 있다. 손 밑에 드러난 발은 두 손과 더불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마애불은 환적의천선사의 원불이라고 전해오며, 높이가 4.5m, 폭이 4.4m인데 머리 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처럼 만들었으며 광배를 겸하는듯하게 처리하였다. 마애불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다시 경내로 들어서 불유각을 지나 산길에 접어들면 호젓한 숲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야생화도 볼 수 있고 더 오르면 한적한 곳에 함허당득통탑(涵虛堂得通塔:경북문화재자료 제134호) 이 자리하고 있다. 함에 당의 사리를 모셔둔 무덤이다.
들통 기화(1376∼1433)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제자이다. 21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세종의 부름을 받아 4년 동안 대차 어찰에 머무르며 교화를 하였고, 곳곳에 많은 행적을 남겼고, 조선 시대 스님 중 가장 많은 저작물을 남긴 인물이다.
봉암사를 새로이 보수하였고 이 사찰에서 『 오가 해설의』, 『현 정론』와 『원각경 소』를 저술하였는데, 『금강 반야경 오가 해설의』은 금 강경과 반야경 해설서로 승려교육의 필수 교재이고, 『현 정론』은 정도전 중심의 배부론에 대한 반론으로, 서론과 14개 항의 문답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불교의 목적, 불교의 교리, 승려의 임무 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원각경 소』는 원각경의 해설서로, 경의 요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였고,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11자에 대한 해석을 한 책이다.
세종 15년(1443)에 들통 기화는 입적하기 전에, “맑고 고요함, 텅 비고 고요함이 본래 하나의 물건이 아니어서 신령스러운 빛이 빛나고 빛나 사방을 두루 비친다. 저세상에서는 몸과 마음이 다시는 생사를 타고나지 않아 가고 오고 또 가고 오고 아무 걸림이 없도다”(湛然空寂本無一物 靈光赫爀洞徹十方 更無身心受彼生死 去來往復也無佳崖)고 임종게를 남겼다.
승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후 상륜부를 얹어 마무리하였다.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였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는 위를 받치고 있는 짧은 상다리 모양을 하고 위에 복련을 두는 하대석을 두고, 중대석은 8각으로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상대석은 앙연을 둘렀다. 8각의 몸돌 정면 한 면에는 문패 형식으로 아래는 앙련을 새기고 위에는 복련을 새겼다. 그 사이에 ‘涵虛堂得通之塔(함허당득통지탑)’이라 새겨 주인공을 밝혔다.
지붕돌 아랫면에는 겹처마의 서까래를 새겼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지붕은 깊은 기왓골을 표현하였다. 지붕의 내림마루 끝은 살짝 들려 귀꽃을 새겼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륜, 보개, 보주가 차례로 잘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승탑은 조선 전기인 15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형태이다.
함허당득통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한 기의 승탑은 함허당득통탑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정교함에서 조금 떨어진다. 이 승탑은 조선 중기의 스님인 환적당 지경(1603~1690)의 승탑(경북 문화재자료 제133호)이다. 지경은 16세에 계율을 받고 팔공산 동화사에 들어가 성현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가 되던 해에 봉화 청량산에 들어가 31년간 솔잎과 밤, 대추를 먹으며 31년간 지내다가 88세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을 마쳤던 인물이다.
탑의 지대석과 기단석까지는 닮아 있으나 몸돌의 한 면에 연화문을 새기지 않고 선으로 문패를 표시하고 그 안에 ‘幻寂堂智鏡之塔(환적당지경지탑)’이라 새겨 주인공을 밝혔다. 지붕돌은 윗면에 여덟 모서리 선이 표현되었고, 기왓골은 두지 않았으며, 내림마루 끝에 귀꽃을 새겼다. 처마의 여덟 귀퉁이는 위로 들려 있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상륜부는 노발, 복발, 보륜, 보개로 장식하였다. 이 승탑은 조선 중기에 세운 것으로, 전체적으로 함허당득통지탑에 비해 세련된 멋이 없고 균형이 불안해 보인다.
환적당지경탑을 지나 숲길을 조금 가파르게 오르면 시원 모습이 숲과 대비를 이뤄 아름다운 모습의 승탑이 서 있다. 승탑의 주인공은 통일신라 효공왕 원년(897)에 개초사에서 수도한 후, 효공왕 3년(899)에 당에 다녀왔다가 경애왕 원년(924)에 귀속하여 백암사를 거쳐 봉암사에서 크게 번영시켰던 정진대사 긍양(878~956)이다. 대사는 지증대사의 손세자에 해당하며, 봉암사를 중창한 고려 초기의 큰 스님이었다.
승탑은 지대석에서 상륜부까지 8각의 단면을 기본으로 한 8각원당형의 모습이다. 지면 위에 놓인 지대석은 높은 평이며 윗면에는 낮고 각진 굄 위에 둥글면서 낮고 각진 2단의 굄이 조식되었다. 기단은 상중하로 구분되어 있으며, 하대석은 딴으로 높직한 아랫단의 8면에는 1구씩의 측연화를 새기고 그 안에 꽃을 돋을새김 하였다. 윗부분에는 받침석을 새기고 그 위에 덮개돌 모양으로 하였다. 중대석 하단에는 구름무늬가 가득하게 조각을 하고 그 위에 각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겉에 구름무늬를 가득 장식하였다.
면석의 각 면에도 구름무늬와 함께 쌍용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면석의 윗부분에는 팔각의 덮개돌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 위의 면석 팔면에 연기문이 각각 새겨져 있으며, 위아래와 좌우에서 안쪽으로 뻗은 꽃무늬를 강조하여 조각해 놓아 특이하다. 영기상 안에는 별다른 장식은 없지만, 윗부분에 보개(寶蓋), 보산(寶傘), 보주(寶珠) 등의 머리장식을 얹은 사리합을 탁자 위에 올린 상태로 앞면에만 새겨 놓았다.
상대석의 밑면에 2단의 받침을 새겼고 그 위에는 16판의 앙련을 돌려가며 새겼다. 복련 위에는 두터운 덮개돌을 새겼고, 또 그 위에 높직한 2단의 굄을 두었는데, 위아래단의 각 모서리에는 모두 난간을 두르고, 윗단의 면석에는 1개씩의 짧은 기둥을 세웠지만 아랫단에는 짧은 기둥을 2개씩 배치하였다. 윗단의 윗면에는 3단의 낮은 굄이 새겨져 있다. 몸돌은 각 면마다 우주를 새겨 놓았지만, 앞면에만 문비(門扉)와 함께 자물쇠가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차례로 새겼고, 이를 이어서 각진 부연이 겹처처마의 서까래까지 가늘게 조각되었다. 각 모서리의 전각(轉角)은 상향(上向)과 반전(反轉)이 심한 편이고, 전각에는 귀꽃이 없다. 윗면인 낙수면의 경사는 꼭대기 부분이 약간 급해 보이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차 평박(平薄)해졌다. 8각의 각 모서리마다 내림마루인 우동은 굵게 표현되었고, 기왓골은 두지 않았다. 상륜부의 노반에는 복련을 둘렀고 복발은 앙련을 두렀다. 앙화 위로 보륜 하나만 얹혀 있다. 탑의 전체적으로 풍기는 멋은 지증대사탑보다 간략화의 경향이 있으며, 고준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도 둔중한 감을 보이는 등 기본 구성과 비례감, 조각수법이 지증대사탑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문화재를 둘러보고 가는 길에 봉암사 입구 우측에 정진대사탑 오르는 초입에 비각 내에 나리하고 있는 정진대사탑비이다.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이라는 시호와 ‘원오’라는 탑호를 내리었다. 고려 초기의 석비형식을 따르고 있는 비는 귀부의 비좌에 비몸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귀부와 이수의 형식은 통일신라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비좌가 두드러지게 커졌다. 귀부와 이수의 조형은 간략해졌고 조각수법은 대체적으로 평이하게 처리되었다. 귀부의 머리는 용두를 따르고 있으나 머리는 보관을 쓰고 중앙에 뿔이 나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등껍질은 곽갑문을 새기고 안에는 둥근 꽃무늬를 새겼다. 발톱은 4개로 날카로우며 꼬리는 가늘고 좌측으로 휘어 있다. 비좌가 닿는 부분 주위로 구름무늬를 새기고 비좌의 각 면에는 영기문을 새겼다. 비좌 상부에는 연꽃무늬를 둘렀고 3단의 받침석을 새겼다. 이수는 앞뒤 모두 5마리의 용이 구름 속을 회유하고 있으며, 전면의 두 마리 용은 여의주를 물고 보주를 바라보고 있고 보주 아래는 두전이 있어 그 속에 ‘靜眞大師碑’라고 음각되어 있다. 뒷쪽의 두 마리 용의 여의주를 물고 서로 마주 보고 한 마리의 용은 중앙에서 구름 속을 회유하고 있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이 퇴화해 보인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李夢游)가 짓고, 글씨는 장단열이 썼다. 비문 중에 ‘聖朝光德二年’(성조광덕2년)이라는 문구가 있어 고려 시대 연호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