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석실서원터와 조말생묘역을 찾아서(2013.06.12)
석실서원터
미음나루의 석실을 빼놓을 수 없다. 안동의 김번이 과거급제하고 난 이후 양주 땅에 터를 잡고 있던 훈구파 남양 홍씨를 아내로 맞이했고, 처가의 근거지였던 양주 땅 덕소에 그의 무덤을 쓰면서 안동 김씨의 세장지가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병자호란 당시 강력한 주전론자였던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과 강화도 함락 당시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폭한 선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형제는 안동 김씨 가문을 일약 조선의 대표적 가문으로 도약시킨 존재였다.
그들이 묻힌 덕소의 석실은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중심이던 그들 안동 김씨 가문의 정신적인 고향인 셈이다.
7년간의 왜란을 승리로 인식했던 조선에서 3개월 만에 야만시하던 여진족에게 임금이 적장 앞에 무릎 꿇는 패배의 충격과 치욕, 그 치 떨리는 모멸감은 김상헌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본받아야 할 충절의 상징 인물이 되게끔 하였다.
김상헌·김상용을 배향한 석실서원은 양주의 인물로 노론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이단상·민정중을 배향하면서 조선후기 사상계, 특히 권력을 지닌 여당인 노론의 혁혁한 권위의 근원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거기에 더해 영민한 후손들은 3수(수증, 수흥, 수항), 6창(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으로 일컬어지면서 2대에 영의정을 3명이나 줄지어 배출했다.
명실상부한 경화사족이 되어갔던 안동김씨 가문은 율곡 이이의 적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과 같은 노론의 종갓집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들의 사상적 바탕이었던 석실서원은 조선후기 사상과 권력의 중심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석실서원은 양주 조씨의 영모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올라 처음 실시한 과거에서 급제한 조말생은 그의 지극한 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애초 금곡에 있던 조말생 묘소는 1900년 고종황제 홍릉의 장지로 결정됨에 따라 이 곳 수석리로 옮겨왔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석실서원이 훼철된 뒤의 일이다. 이렇듯 양주 조씨 영모재 옆의 폐허가 된 석실서원 터는 한 시대의 영화를 거칠게 보여줄 따름이다.
조말생은 1370년(공민왕 19) 서운관장(=현 기상청의 장) 조의의 아들로 태어나 1401년(태종 1)생원으로서 증광문과(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요물고부사(중국에 보내는 사신 담당)에 임용되었고, 감찰(사헌부의 정6품의 벼슬), 정언(사간원의 정6품의 벼슬), 헌납(사간원의 정오품의 벼슬)을 거쳐 이조정랑(6조의 실무를 관장)에 승진하였다. 1407년 문과중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전농시부정이 되었으며 다시 장령(사헌부 정4품 벼슬),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1411년에는 판선공감사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에 잠시 배명되었으며, 승진하여 지신사(도승지=지금의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고 1418년에는 이조참판에 이르러 가정대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26년(세종 8)에 장죄(=뇌물수수)로 연좌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1432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다음해에 함길도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1434년 9월에 지중추원사가 되고, 1435년에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대제학을 지냈다.
그리고 1438년에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궤장을 하사 받았다. 1442년에 승록대부가 되었으며, 1446년에 영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다음해(7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