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찾아서(2013.03.13)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찾아서
모처럼 떠나는 답삿길은 잔득 흐린 아침 날씨로 출발하였다.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굴산사 터의 당간지주와 승탑, 신복사지에서 보살좌상과 삼층석탑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또한 오후 2시에 동양자수박물관에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가 수놓았던 아름다운 전통 자수 문양을 살펴보기로 하고 미리 박물관 관계자와 일찍 약속을 해 두었는데, 강릉에 폭설이 내린다는 방송에 그만 강릉을 포기하고 문막에서 뒤돌아가야만 했다. 고속도로에서 국도, 지방도로를 오가며 찾은 곳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법천사지이다.
몇 해 전에도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한창 발굴하는 것을 보고 갔었는데, 아직 발굴이 마무리되지 않는 것 같다. 몇 백 년 홀로 되어 온 몸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터를 지키는 느티나무는 한 사람이 들어가도 남을 만큼의 구멍이 나있다. 잎이 무성했던 여름날 친구와 함께 그늘에 앉아 땀을 말리던 그날이 생각났다.
법천리의 명봉산 자락에 자라 잡았던 법천사지는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한 사찰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모두 없어지고 가지런히 정리된 건물터만 남아 있고, 주변에 흩어진 석재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나그네로 남아있다. 건물터에 서서 옛 모습을 그릴 수 있을 만큼 넓은 터는 붉은 가사를 펼쳐 놓은 듯하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당간지주와 지광국사현묘탑, 그리고 자그마한 우물뿐이다.
올곧게 자리 잡은 천년의 틈새는 푸른 이끼가 역사를 마감하였고, 새롭게 끼어놓은 새 역사의 흔적은 절름발이 역사로 다시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모두가 멈춰버린 채 빛마저 잃어가고 있다. 조각난 소맷돌, 희미해진 화염문, 제짝 잃어버린 석등, 주춧돌만 남은 건물터, 어설프게 쌓아 놓은 석탑, 기울어지는 기단석 등등 석공의 장인 정신마저 모두 산산 조각이 나 있다. 어디서부터 하나씩 엮어볼까 많은 생각을 해 보면서 남아 있는 석물에서 혼을 불어 넣어 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해 보았다.
[흩어진 석재물을 이곳에 모아 두었다.]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섬세한 문양에 감탄]
[계단의 소맷돌, 깨어진 상태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석재 문양에 등자아지 않는 처음 보는 화문]
희미하게 남아 있는 광배의 화염문과 불상문은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일부 석탑재로 쌓은 석탑은 어딘가에 이 석탑이 세워져 있었다는 증거물로 소임을 다 하고 있다.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는 석재 한 부분은 진흙으로 빗어 놓은 목단문양은 석공의 솜씨를 읽을 수 있었고, 간주석이 없어진 석등은 하대석만 남아 있다. 방향을 잘 못 잡은 건물터의 주춧돌은 복원하면서 좀 더 관심을 기울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모든 것이 절름발이가 된 문화유산은 이 모습에서 더 발전하기란 역사에 맡길 뿐이다.
[지광국사탑비 전경] [기단위에 앉은 귀부]
[귀갑문의 왕자문양] [왕자문양이 모두 88개가 있다]
귀부 등에 세운 지광국사탑비는 법천사의 주인이다. 통일신라 하대에 이 지역에 세워진 대표적 사원으로 고려초기 유가종사원으로 금산사와 함께 개성 밖 지방 선종사찰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 했다고 한다.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 왕실과 문벌귀족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넓게 펼쳐진 사찰지와 건물지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을 지켜온 지광국사 혜린(海麟)은 어떤 인물이기에 거북형상의 받침돌 위에 비를 세우고 그 위에 보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렸을까? 깨알같이 비문에 쓴 글씨는 그의 일대기를 모두 기록해 두었다. 고려 성종 3년, 즉 984년에 태어났고 1004년에는 승과에 급제하고 999년에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문종 대인 1058년에 국사가 되고 법천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비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18년이 되는 해에 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승탑과 함께 이곳에 세워졌으나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오사카까지 몰래 빼돌려졌다가 다시 반환되면서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옆 은행나무 앞에 세워져 있으며,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대석으로 6단의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10단으로 된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비 앞에 이른다. 앞에는 흩어지고 훼손되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석재 모아 둔 장방형 공간과 우측에도 같은 모양의 장방형 공간으로 2단의 단을 두었으며, 뒤쪽에도 같은 모양의 공간이 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안내가 없다. 3곳의 공간 중 한 곳은 승탑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곳곳의 폐사지를 찾아가 보았지만 탑비 주변 3곳에 건물지가 있는 곳은 보기 드문 것인데 이곳은 다른 사찰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가까운 거돈사지의 탑비는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건물터가 확인되지 않으며, 강릉 보광사의 탑비도 사찰 누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건물이 없다.
[귀부의 용두] [구름을 차고 있는 거북]
[보상당초문과 봉황] [보상당초문]
보호철재로 둘러져 있는 탑비의 기단부는 긴 장대석이 원래의 형태를 잊어가고 있다. 보수를 해야할 부분인 것 같다. 목을 곧게 세우고 잎을 벌린채 앞 건물지를 바라보고 있는 거북은 거북의 얼굴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더 가까운 형상이다. 신라시대의 무열왕릉비의 귀부에서 보듯이 거북 머리모습에서 점차 용머리로 변모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용머리를 한 거북 모양의 귀부가 많이 보급되어 왔다. 거북은 장수의 상징이고 용은 권력의 신성함을 보증하는 상징물로 전해오고 있다. 신성한 권력을 오래도록 유지하려는 의미가 부각되어 턱밑까지 기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등껍질은 6각형의 거북문양이 아닌 사각형으로 구획된 안에 6각의 귀갑문을 새기고 그 안에 '王'자 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모두 88자다. 그 의미는 최고의 법계인 ‘국사國師’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몸 아래쪽에는 구름무늬를 새겨 두어 제행무상과 변화무상하고 다양한 색체를 만들며 한 하루도 단 한순간도 같은 형태와 같은 색과 모양을 보여 주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문양을 파수문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4면의 지대석 우에 새겨진 문양이 문살이 뒤로 흘러가는 형태로 표현했기 때문에 위의 문양과 연결시키면 바다 위에 문살을 헤치고 앞을 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답은 보는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느껴지는 것이 될 것 같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구름은 세속을 멀리 떠난 초월의 경지를 상징하고, 기독교에서는 심판을 의미한다.
비좌는 연잎이 아래로 모인 복련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으며, 일반적인 비와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비몸의 양 면에는 화려하게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구름은 신하인 국사이고 용은 왕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청석으로 만들어진 비몸의 위쪽에는 정교하게 보상당초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로 날아가는 봉황이 좌우에서 각각 3마리가, 좌측에는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가 동그란 해 속에 들어 있고, 우측에는 달을 상징하는 계수나무 아래 토끼가 동그란 달 속에 갇혀 있는 문양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푸른하늘 은하수‘에 나오는 ’계수나무와 토끼‘가 이미 이전부터 우리의 선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 근대에 와서 노래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나팔을 불고 하늘을 나는 천사의 나팔소리가 들리 듯한 섬세한 새김과 꽃을 피운 불수가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비몸 머리 중앙에는 비의 주인공인 지광국사의 비명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비몸의 바깥쪽에는 보상당초문을 조각하여 돌린 것이 특징이다.
[비명] [보상당초문과 봉황]
[봉황이 비신 좌우에 있으며 그 위쪽으로 삼족오와 계수나무 토끼가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보관을 쓰고 있는 뜻한 모습이다. 비몸과 마주한 곳에는 2단의 받침을 모각하였고, 그 위로 사방으로 앙련을 겹으로 둘렀다. 또한 그 위에는 구름 속에 여의주가 화염에 싸여 있고 좌우로는 용이 각각 여의주를 향해 오고 있으며 좌측면과 우측에도 구름을 회유하는 여의주를 보고 있는 용두가 새겨져 있다. 사면에는 귀꽃이 뾰족하게 뻗어 있고 정면과 뒷면에는 사면 외에 3개의 귀꽃이 솟아 있고, 측면의 좌우에는 중간에 귀꽃을 세웠다. 머릿돌 중앙에는 3단으로 연꽃무늬를 조각한 보주를 얹었다.
비문은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할 때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의 글은 정유산이란 사람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라는 사람이 중국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썼다고 하는데 부드러운 필체가 종이 위에 흘러 내리는 듯 하다. 고려시대의 석비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걸작 중에 걸작으로 조각 또한 정묘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주변의 석재와 건물터, 비까지 둘러보고 당간지주로 향했다. 당간지주는 마을의 건물이 둘러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의 당간지주는 멀리서도 볼 수 있는 건물지의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반대방향에 있는 것 같다. 불과 걸어서 3~4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법천사의 절터를 지키고 있는 것 중에 또 하나이다. 마을 창고 옆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지주는 양간을 지탱하기 위해 돌기둥 두 개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안내되어 있으나 전체적이 모습을 보면 당간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거시 아니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세워진 것 같다. 최소한 지주 중간 한곳에 간공이 있어 당간을 아래와 위쪽에서 고정시키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 당간은 아래에 볼록 위로 올라온 간대와 위쪽의 홈인 간구뿐이다. 별도의 고정 장치가 있다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현재의 당간지주를 보면 당간을 세우면 불안한 느낌을 받는다. 가까운 굴산사 터의 당간지주와 안양의 중초사지 당간지주에서 보듯이 중간에 당간을 더욱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간공을 둔 것을 볼 수 있다.
[당간지주 전경] [2개의 돌기둥이 마주보고 서 있다]
[간구만 있고 간공이 없는 당간지주] [당간지주 하대 중앙에 자리한 간대]
지광국사탑비와 당간지주만이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융성했던 법천사임을 증명해 준다. 남한강과 연결된 법천을 끼고 있는 거돈사와 섬강을 끼고 있는 흥법사와 고달사, 그리고 법천사는 한강변 수상교통과 깊은 관계가 있지 않을 숙제로 남기고 싶다. 하나 같이 강가에 있으면서 모두 옛 모습 사라지고 용두에서 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거돈사지의 원공국사탑비의 귀부, 흥법사지의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고달사지의 원종대사탑비, 그리고 법천사지의 지광국사탑비의 귀부는 하나 같이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 해답이 있을까?
아직 못다 찾은 깊은 뜻은 다음으로 미루고 또 다른 문화유산을 찾아 떠난다.